1919년 3월 2일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와 3·1운동에 관한 연락이 천도교 전주교구실을 통하여 임실교구실에 도착하였다. 그 날 교구장 한영태(韓榮泰)는 천도교종리원[현 임실군 임실읍 성가리 367]에서 강계대(姜啓大)·김영원(金榮遠)·박성근(朴成根)·박판덕(朴判德)·우성오(禹成五)·최양옥(崔養玉)·한준석(韓俊錫)·황성진(黃成瑱) 등을 통하여 임실읍·둔남면(屯南面)·성수면(聖壽面)·오천면(烏川面)·운암면(雲岩面)·청웅면(靑雄面) 등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게 하였다.
3월 12일 임실읍 장날 임실읍 장터(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소재)[현 임실읍 이도리 762 일대]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헌병과 일제 경찰의 출동으로 흩어졌다가 밤이 되자 1000여 명이 집결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3월 15일 청웅면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5일 오후 9시경 구고리(九臯里)에서 10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자진 해산하였다. 16~7일에는 박용식(朴庸植)·이강세(李康世)·이기섭(李起燮)·이성의(李聖儀)·최종수(崔宗洙)·한기수(韓淇洙)·한도수(韓道洙) 등이 구고리에서, 박준창(朴準昌)·정필조(鄭弼朝) 등 약 150명은 남산리(南山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석두리(石頭里)·옥전리(玉田里)에서도 약 100명이 만세를 불렀다. 21일에는 구고리와 남산리 주민 15명이 임실경찰서에 몰려가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석방 시위를 하였다.
3월 20~21일에는 지사면(只沙面) 방계리(芳溪里)에서 김영필(金泳弼)·최기현(崔基鉉)·최상학(崔相鶴)·최영렬(崔永烈)·한인석(韓麟錫)이 50여 명의 군중에게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한 후, ‘대한제국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23일 갈담 장날에는 강진면(江津面) 갈담리(葛潭里)에서 엄길영(嚴吉永)·이중혁(李重赫) 등이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6일 신덕면(新德面)의 나학용(羅學用)·한정교(韓正敎) 등이 삼길리(三吉里)와 신흥리(新興里)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7일 김제룡(金濟龍)·문성술(文成述)·송귀남(宋貴男)·송성학(宋性學)·최극삼(崔極三) 등이 성수면 오봉리(五峰里)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12일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 천도교 교구실에서 김영원(金榮遠)이 전교사 한준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부를 받아 선거리(仙居里)·입석리(立石里)·학산리(鶴山里) 등지에 붙이고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임실에서는 3·1운동으로 80여 명이 옥고를 치렀는데, 그 중 김영원과 한영태는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임실군의 3·1운동은 1달 이상 지속되면서 임실군 전역에서 일어났다. 형을 받은 사람만 80여 명에 이를 만큼 대대적인 시위였으며, 천도교 신자들이 주도한 만세 운동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