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갔던 태인면의 김현곤(金玹坤) · 박지선(朴址宣) · 송수연(宋洙連) 등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김부곤(金富坤) · 김순곤(金淳坤) · 김용안(金龍安) · 김진근(金鎭根) · 김진호(金鎭皓) · 백복산(白福山) · 송덕봉(宋德奉) · 송영근(宋榮根) · 송진상(宋鎭相) · 송한용(宋漢鏞) · 오석흥(吳錫興) · 유치도(柳致道) · 최민식(崔民植) 등과 3월 5일 태흥리 송수연의 집에 모여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현곤은 비밀결사 ‘15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논의를 주도하였다. 3월 7일에는 서울에 유학 중이던 김달곤(金達坤) · 송문상(宋文相)이 이들과 합류하여 계획을 논의하고, 3월 16일 태인 장날에 헌병대의 정오 타종을 기해 만세 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태인면 사무소 서기였던 김현곤은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해 송한용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수천 장을 등사하였다.
3월 16일 태인 장날, 정오 타종을 신호로 태인 장터(정읍군 태인읍 태성리)[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105 일대]에 모인 군중에게 박지선 · 송진상 · 송한용 등은 몇 명씩 짝이 되어 준비해 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5~6명의 청년은 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 청년들 약 200명과 함께 면사무소 부근에서부터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장에 모였던 수천 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밤이 되자 태인읍을 가운데 두고 사방 산마루에서 횃불이 오르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렸다. 이러한 야음(夜陰)을 이용한 산상 만세와 소집단의 만세는 10여 일간 계속되었다.
송수연은 징역 2년, 김현곤은 징역 1년 6월, 송한용은 징역 10월, 송진상은 징역 8월, 박지선 · 오석흥은 징역 6월을 선고 받았고, 최민식은 9대의 곤장을 맞았다.
태인은 호남선이 통과하는 곳이기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며, 더욱이 태인의 장터에서 일어난 3·1운동이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 3월 16일의 시위 이후에도 소집단의 시위가 10여일 계속되었다는 점도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