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5월 부친 이동휘가 참령(參領)으로 승진하고 강화진위대장(江華鎭衛隊長)에 임명되자 조부 이발(李發), 언니 이인순(李仁橓) 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였다.
1911년 초 이동휘가 중국 지린성〔吉林省〕 용정(龍井)에서 재만(在滿) 한인을 위한 농업진흥책과 여성 교육을 강조함에 따라 2월에 명동학교(明洞學校) 병설 여학교가 증설되었다. 명동학교는 옌볜〔延邊〕 일대의 한인 사회에서 처음 설치된 근대적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같은 해 가을 함경북도 성진(城津)에서 살다가 부친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지린성 국자가(局子街)로 이주하여 명동학교 병설 여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인근 마을에 야학을 설치하고 부흥사경회(復興査經會)도 개최하였다.
1918년 가을 이동휘의 지시에 따라 이의순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신한촌(新韓村)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애국지사 채성하(蔡聖河)의 맏딸 채계복(蔡啓福)과 함께 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1919년 3월 부인회가 한인독립회로 명칭이 바뀔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10월경에는 당시 한인독립회의 회원은 50명이었다. 또한, 미래의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의 양성을 위하여 조선인적십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5월 지린성 용정촌흥업회사에서 김연수(金演洙) · 안창만(安昌萬) · 이창래(李昌來) 등과 함께 상업에 종사하는 청년 10여 명을 규합하여 용정촌 한인에게 독립운동 지원 문제, 상무회(商務會)와 조선인거류민회의 개선 방안 문제를 의론하였다.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3 · 1운동 기념식에서 이혜주(李惠柱) · 채계복 등과 함께 부인회를 조직하여 재러한인들의 독립 행진을 주선하였다. 이때 2만 명의 한인이 모여 만세 삼창을 하고 거리를 행진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하여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선임되어 상하이로 진출하자, 1920년 조부 이발과 함께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간 이동휘와 달리, 계속 상하이에 남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 김두봉(金斗奉)의 처 조봉원(趙奉元) 등과 함께 임시정부 외곽 단체인 상해한인애국부인회를 개조하여 좀 더 급진적인 상해한인여성동맹을 조직하려 하였다. 이것이 여의치 못하자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상해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상해한인애국부인회의 대표인 집사장(執事長)을 맡았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