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화(崔善嬅)는 1911년 6월 20일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6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간호대학을 중퇴하고 안창호의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1937년 5월에는 광저우〔廣州〕에서 흥사단 창립기념식에 참석하였다. 이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차장이던 독립운동가 양우조(楊宇朝)를 만나 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후에 그와 혼인하였다.
194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쓰촨성〔四川省〕 기강(綦江)으로 이전한 뒤에 재중 한인 교포 부인들과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하는 주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충칭〔重慶〕에서 김구의 한국국민당 등을 통합한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가입하여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43년 2월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국민정부의 임시수도 충칭으로 옮겨 가서, 1919년 3 · 1운동 직후 조직된 애국부인회의 재건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후 여성의 각성과 조국의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서무부장에 선출되었는데, 회장에는 김순애(金淳愛, 김규식의 부인)가 추대되었다.
재건 한국애국부인회의 중심인물은 대부분 임시정부의 일원,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임시정부와 연계된 여성들이었다. 따라서 이 조직의 목표 역시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하여 중국 관내 지역 여성단체를 통합하려는 데 있었다.
최선화 · 연미당(延薇堂) · 정정화(鄭靖和) 등은 임시정부를 도와 각 방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방송을 통해 국내외 여성들에게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였으며, 위문품을 거둬 항일전선에서 투쟁하는 한국광복군에 전하는 한편, 여성 · 청소년들의 계몽과 교육 운동에도 헌신하였다.
최선화 등 한국애국부인회 간부들은 “한국은 완전 독립하여야 한다. 외국의 어떠한 간섭에도 반대한다.”라는 내용의 강연과 토론회를 갖고 한국 민족의 독립, 민족국가의 건설 등을 골자로 하는 4개 항의 재중국한인대회 선언을 국내외에 발표하여 거족적 결의를 표시하였다. 또 대회 주석단 이름으로 각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을 통해 부당한 언론 탄압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공개 서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 우리는 실로 각 동맹국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 이 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공고한 단결과 자력갱생이다. 이러한 역량을 가져야만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어서라! 우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로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단체라도 모두 모이라! 그리하여 승리적인 전도를 향하여 용감히 전진하자!”
이처럼 각 지방 동지와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깃발 아래 일치단결하여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 등 동맹 각국에 우리 민족이 대일 작전의 주요 역량임과 우리 임시정부의 국제적 합법 지위를 인정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