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백수(白水)이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김천의 봉계공립보통학교 4학년 무렵 여름에 홍수로 전답을 잃고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32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다니던 보통학교를 마쳤다. 1938년 전덕행과 결혼하였다. 시조 「북풍」의 내용이 불온하다고 판단되어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서 오른손 중지를 쓸 수 없게 되었고, 이후 고문의 경험이 작품세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시조를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담은 양식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시조 범국민운동을 제창하였다. 제 나라 민족시를 모르는 민족이 우리 민족이라며 민족 정서를 모르는 실향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민족 전통의 장르를 온 국민이 즐겨 읊고 후손에게도 물려줘야 할 민족 자랑이라고 강조하였다.
해방 후인 1946년 고향으로 돌아와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늦은 나이에 시조문학을 현대시로 변모시킬 뜻을 품고, 여러 일간지 신춘문예와 문예지 추천을 통과했다.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해바라기」 당선, 같은 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골목길 담 모롱이」 당선,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조국」 당선, 같은 해 『현대문학』에 「애모」·「강」·「어제 오늘」로 추천완료,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해바라기처럼」 당선 등 화려하게 문단에 입문하였다. 마흔이 넘어 문단에 올랐지만 평생 시 공부에 전력해서 아흔을 넘어서도 일기 쓰듯 매일 시 공부를 하였다.
1966년 이호우와 함께 시조문학회를 창립하였다. 1969년 첫 시집 『채춘보(採春譜)』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집을 발간하였다. 1979년 시 100편과 사진 100장으로 환갑기념시사집 『백수시선』을 발간하였다.
그 밖에 작품집으로 『연(蓮)과 바람』, 『난(蘭)보다 푸른 돌』, 『오동잎 그늘에 서서』, 『이승의 등불』,『세월이 무엇입니까』 등이 있다.
한국문학상, 만해시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