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선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북로군정서와 신민부에 가담하여 대일항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오옥인(吳玉仁)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10년 7월 3일
사망 연도
2006년 8월 5일
출생지
중국 길림성 왕청현
정의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북로군정서와 신민부에 가담하여 대일항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개설

일제강점기 만주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신민부(新民府) 등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오옥인(吳玉仁)이다. 1910년 7월 3일 만주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만주지방총회 산하의 석두하자 지방회 회장인 아버지 오사언(吳仕彦)과 어머니 김신경 사이의 2남 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적은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용문면(龍門面) 성당리(聖堂里)이다.

생애

오항선의 아버지는 동청철도 건설 당시 석두하자에 단신 이주하여 철도 침목용 원목을 벌목하여 철도 건설에 투입하는 노동을 하였다. 1918년경 가족이 석두하자로 이주하여 오항선은 석두하자에서 성장하였다. 17세 되던 해인 1927년 북로군정서 출신의 독립군인 유창덕(兪昌德)과 결혼하고 슬하에 아들 유관철을 낳았다. 남편과 함께 독립군 활동을 하였으며, 1931년 유창덕이 사망하자 이후 하얼빈과 삼성(三姓) 등지로 전전하다가 1935년에 권헌(權憲)과 재혼하였다. 권헌은 안중근(安重根)의 누이동생인 안성녀(安姓女)의 아들로, 인쇄소와 정미소를 운영하며 비밀리에 독립군에게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광복 후 만주에서 귀국하였으며,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해 부산에 정착하였다. 2006년 8월 5일 부산광역시 사상구 부산보훈병원에서 급성 폐렴과 노환으로 향년 9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활동사항

남편 유창덕과 함께 대일항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독립군의 식사와 의복 보급 등 뒷바라지를 하였다. 신민부가 조직되자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지휘를 받아 무기운반과 은닉, 그리고 외부와의 연락책임을 맡아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신민부는 1927년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로 양분되어 분열을 겪은 데다가 1928년 1월 신민부 소속의 독립운동가 40여명이 회의하던 중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김혁(金爀)과 유정근(兪政根) 등 8명이 체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오항선은 간신히 피신하여 숨겨둔 무기를 다른 곳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

1930년 1월 24일 흑룡강 해림시(海林市) 산시진(山市鎭)의 금성정미소에서 총격을 받고 김좌진이 서거하자 김좌진 부인 나혜국(羅惠國)과 부하 동지들의 경제생활을 지원했으며,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을 위해 6명의 결사대를 조직한 고강산(高崗山), 김수산(金壽山) 등에게 권총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1930년 9월경 석두하자 집에서 오항선·유창덕 부부와 이웃에 살던 친동생 오해산이 모두 체포되어 5개월 간 취조당하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오항선은 길림성 감옥에 1년 2개월간 투옥되었다가 1931년 석방되었다. 아버지 오사언은 딸과 아들이 투옥되자 낙담하여 자결하였다. 투옥 중이던 남편과 동생은 1931년 10월에 일본군에게 총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하였다.

참고문헌

『미주국민회자료집』18(하와이·시베리아·만주지방총회)(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도산학회편, 경인문화사, 2005)
『독립유공자 증언자료집』 1권(국가보훈처, 2002)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 오항선」(국립여성사전시관 구술사료아카이브)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박환, 일조각, 1991)
『국제신문』(2005.7.31; 2005.9.13)
집필자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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