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 1752~1800)는 1776년에 즉위하면서 자신의 정치 개혁을 위하여 설치한 기구 중의 하나로 규장각(奎章閣)을 건축하였다. 정조는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부터 장서 수집과 정리, 보관에 대해 독자적으로 구상한 바 있었으며, 규장각 설치 당시의 장서는 약 3만 권에 달했다. 정조는 이 도서를 중국본[華本]과 한국본[東本]으로 나누고, 이들 도서의 보존과 열람을 위하여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藏書閣)으로, 중국본 소장을 위해서는 규장각의 서남쪽에 열고관과 개유와를 1777년 8월에 함께 건립하였다. 또 한국본 소장을 위해서는 열고관의 북쪽에 서고(西庫)를 지었다. /* (<그림 1> 참조)그림은 본문에 나타나지 않음.
<그림 1> 삽입 위치*/
열고관과 개유와는, 규장각의 맞은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부용정(芙蓉亭, 芙蓉池)의 남쪽이다. 이 건물에 대한 자료 중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은 ① 김홍도(金弘道, 1745~?)의 「규장각도(奎章閣圖)」, ② 순조(純祖, 1790~1834) 시기에 만들어진 「동궐도(東闕圖)」 및 ③ 「동궐도형」, ④ 1928년에 만든 「유리건판 필름」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앞서는, 「규장각도」에는 1층의 개유와 건물만 보이고, 열고관은 보이지 않고 있다. 즉, 정조가 규장각을 처음 건축할 당시에 열고관은 계획에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정조는 즉위한 직후에 사절을 청에 보내면서 부사 서호수(徐浩修, 1736~1799)에게 특별히 당시 청 왕조에서 편찬중이던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구입해 오라는 명을 내렸지만, 현지에 도착한 사절단은 당시 『사고전서』는 아직 인쇄가 완료되지 않았고 인쇄한 수량도 4건에 불과하여 구입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방향을 바꾸어 ‘『고금도서집성』 5천 20권에 5백 2갑(匣)’을 당시 숙소를 출입하던 서반(序班)들을 통해 구입하였다. 그리하여 서호수(徐浩修)가 중국에서 1만 여권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수입해 귀국(1777.03.)하면서, 열고관을 서둘러 증축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열고관 · 개유와’는 하나의 건물에 2개의 이름이 있지만, 당시에 증축하면서 용도(用途) 등에 따라 이름을 붙이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열고관 · 개유와’에서 소장하였던 중국본 도서들에 대한 규모는, ‘장서각 소장의 『열고관서목』’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개유와서목』(표제는 규장총목)’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림 2> 삽입 위치 그림은 본문에 나타나지 않음. 그림 2 표시 삭제함.*/
열고관 열고관은 ‘정면 1칸, 측면 3칸의 2층 건물’로, 온돌 없이 모두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어, 서고의 기능을 담당한 곳으로 보인다. 건물의 외부 창호는 모두 들어올리는 창문인 들문으로 되어 있어, 창문 전체를 개방할 수 있으며 또한 환기를 원활하게 하는 기능을 우선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열고관의 정면은 12자[尺]로 추정된다. 열고관은 중국책을 보관하던 도서실이었는데, 『고금도서집성』을 들여와 이곳에 보관하였다.
개유와 「동궐도형」에 의하면, 개유와의 주공간은 3칸으로, 북측 2칸은 온돌방이며, 남쪽 1칸은 마루다. 그리고 외부로 퇴칸이 붙어 전형적인 궁궐 침전(寢殿)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개유와의 용도를 추정해 보면, 온돌과 퇴칸을 설치한 2중 공간으로, 서고의 역할보다는 도서의 열람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열고관에 보존된 책을 개유와로 가져와 계절에 따라 대청과 온돌방에서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한 열람실로 볼 수 있다.
서고로서 개유와와 열고관의 기능은 고종(高宗, 18521919)이 순종(純宗, 재위 19071910)에게 양위하던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1907년 11월에 규장각은 관제(官制) 개정으로 역대 왕의 유물과 저술을 보관하는 업무 이외에 종친부와 홍문관(弘文館)의 업무도 통괄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홍문관, 시강원, 집옥재(集玉齋), 춘추관(春秋館) 등에 소장되었던 책들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되었던 전적 도합 10여만 권을 통합 · 관리하고, 이를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명명하였다.
1910년(융희 4)에 한일합병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제실도서는 잠시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였다. 이듬해 11월에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제실도서를 인수하여, 역대 왕의 어제 · 어필 · 선원보첩(璿源譜牒) 등은 창경궁 내에 일본식 건물 봉모당(奉慕堂)과 보각(譜閣)을 지어 보관하고 이왕직에서 관리하였다. 1912년에는 제실도서를 참사관분실(參事官分室)에서 관리하였고 도서의 명칭을 규장각도서로 바꾸었다.
1923년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 도서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1930년에 3차에 걸쳐 실행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도서가 조선총독부 학무국(學務局)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개유와와 열고관은 훼철되어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