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기(窺基, 632~682)는 당의 장안(長安) 출신으로 속성은 위지(尉知)이고, 자는 홍도(洪道)이다. 17세에 출가하여 현장의 제자가 되었다. 23세에 자은사(慈恩寺)로 옮겨 현장에게서 범어와 불교 경론을 배웠다. 25세 이후에 역경 사업에 참여하였다. 659년에 현장이 유식학의 논서들을 한역할 때, 규기는 신방(神昉) · 가상(嘉尙) · 보광(普光) 등의 세 사람과 함께 검문(檢文) · 찬의(纂義) 등의 역할을 맡았지만, 『성유식론』의 한역 과정에 있어서는 규기 한 사람만 참여했다. 이후 현장이 『변중변론(辯中邊論)』 · 『이십유식론(二十唯識論)』 등을 한역할 때도 규기가 필수의 일을 맡았고, 이후 그에 대한 주석서도 지었다. 51세를 일기로 자은사의 번경원(飜經院)에서 입적하였다. 규기는 중국 법상종의 초조로 불리었고, 백본(百本)의 소주(疏主)로 불릴 만큼 다양한 경론에 대한 주석서를 작성하였다.
이 책은 송광사 화엄전 53불화도(불조전(佛祖殿) 구장)의 복장낭에서 나온 낱장 1장의 단간(斷簡)이며, 『유가사지론약찬』 제7권의 제24장에 해당한다. 목판본이며 1장의 크기는 40.0×55.8㎝이다. 판식은 사주단변, 무계, 1판의 행자수는 32행 24자, 판수제는 ‘찬칠(纂七)’이다. 국내외 전존본으로는 『조성금장』본의 일부가 중국 국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타 시기 미상의 간본과 필사본이 일본의 용곡대(龍谷大) 등에 소장되어 있다.
편찬 및 간행 경위는 미상이다.
이 책의 제1권이 시작할 때 나오는 7언 24구의 게송은 인도의 최승자(最勝子) 등이 쓴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 앞부분에 나오는 것이다. 이 귀경송 이후 규기는 『유가사지론』을 6문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6문은 다음과 같다.
1문은 서소위(敘所爲)로서, 이 『논』이 설해진 목적을 설명하는 내용인데, 상세한 설명은 『성유식론장중추요』를 참조하라고 말하였다. 2문은 창소인(彰所因)으로, 이 『논』이 나오게 된 연유를 설명하는 내용인데, 현장이 이 『논』을 한역했다는 점 역시 소개하고 있다. 3문은 명종서(明宗緒)로서, 『유가사지론』이 17지를 종요(宗要)로 삼는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4문은 현장섭(顯藏攝)으로, 이 『논』이 보살장아비달마(菩薩藏阿毘達磨)에 속한다는 점을 밝혔다. 5문은 해제목(解題目)으로, 이 『논』의 명칭을 해석하는 내용이다. 6문은 석본문(釋本文)으로, 본문을 순서대로 해석하는 내용이다.
이 책의 제1권은 이상의 내용과 더불어 『유가사지론』 「본지분」의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와 「의지(意地)」를 해석하고 있다. 제2권은 『유가사지론』 제3권의 「의지」와 제4권, 제5권의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를 해석하고 있다. 이후 제12권에 이르러 『유가사지론』 50권까지의 본지분(本地分)을 모두 해석하였고, 마지막인 제16권에 이르러서는 『유가사지론』의 61권부터 66권까지를 주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규기의 『유가사지론약찬』은 『유가사지론』의 본지분 전체(1권50권)와 「섭결택분(攝決擇分)」의 일부(51권66권)를 주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 「섭결택분」의 나머지(67권80권), 「섭석분(攝釋分)」(8182권), 「섭이문분(攝異門分)」(83권84권), 「섭사분(攝事分)」(85권100권)에 대해서는 주석이 남아 있지 않다. 『유가사지론』의 후반부에 대한 주석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규기가 이 책을 만년에 저술하였으므로 67권 이후를 완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나, 혹은 스스로 절필했을 가능성 등이 제기되고 있다.
『유가사지론약찬』은 산일하여 10권 전체가 전하지 않지만 고려시대 유통본인 이 책을 통하여 그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 문헌학적 의의가 있다. 또한, 이 책은 고려 전기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수록되어 있지만 유통본은 소개된 바 없다. 이 책을 통해 고려 및 조선시대 불전의 수용과 유통이라는 관점에서 동아시아 한문 불교 문화권의 교류사적 의의를 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