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

불교
문헌
고려전기 승려 의천이 대장경에 대하여 해석한 장소(章疏)를 수집하여 목록을 정리한 불교서. 불교주석서.
이칭
이칭
속장경
내용 요약

『교장』은 고려전기 승려 의천이 대장경에 대하여 해석한 장소를 수집하여 목록을 정리한 불교주석서이다. 의천은 ‘백가의 과교를 일장으로 모아 유통’케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국내는 물론이고 송, 거란, 일본에 있는 장소를 수집하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간행하였다. 의천이 수집하여 간행한 교장의 내용은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수록되어 있다. 대장경에 대한 연구논문을 집성하고 간행하여 불교교리 연구에 획기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고려를 축으로 하여 동북아시아를 불교문화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의
고려전기 승려 의천이 대장경에 대하여 해석한 장소(章疏)를 수집하여 목록을 정리한 불교서. 불교주석서.
내용

교장(敎藏)은 그 동안 속장(續藏), 속장경(續藏經), 속대장경(續大藏經) 등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교장은 의천(義天: 1055년 10월 30일(음력 9월 28일) ~ 1101년 10월 28일(음력 10월 5일))이 경 · 율 · 논 등의 삼장(三藏)대장경에 대해 연구하여 해석한 장소(章疏)를 수집하고 그 목록을 만들고 간행한 것이다.

명 칭

교장이란 각종(各宗)의 장소(章疏)를 모은 것이다. 그런데 속장(續藏) 등의 단어는 대장경에 누락된 것을 모아서 편찬한 후편과 같은, 또는 대장경에 이어지는, 그리고 계속되는 의미를 지닌 대장경 범주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대장경을 불교서적의 총서(叢書)로 생각하여 여기에 장소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의천의 교장은 대장경과는 달리 경 · 율 · 논에 대한 연구논문에 해당한다. 때문에 이러한 교장은 대장경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대장경의 후편이나 속편 차원이 아니다. 또한 대장경에 빠졌거나 누락되어 뒤에 추가로 편찬한 이른바 속장이나 속장경 또는 속대장경도 아니다.

의천의 교장이 처음으로 속장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11년에 소야현묘(小野玄妙)의 「고려우세승통의천(高麗祐世僧統義天)의 대장경판조조(大藏經板雕造)의 사적(事蹟)」에서 “4천 권의 제종장소(諸宗章疏)를 속대장경(續大藏經)이라 칭할 수밖에 없다”라고 한 것과, 1923년에 지내굉(池內宏)이 쓴 「고려조(高麗朝)의 대장경(大藏經)」에서 “의천의 속장”이란 명칭을 사용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1937년에는 대옥덕성(大屋德城)이 『고려속장조조고(高麗續藏雕造攷)』라는 단행본을 간행하여 그 명칭이 굳어졌다. 이후 의천의 교장은 아무런 의심없이 속장(續藏)으로 불리게 되었고 국내학자들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의천은 자신이 수집한 장소를 모은 것을 교장이라고 하였음은 『대각국사문집』에 실려있는 「신편제종교장총록서(新編諸宗敎藏總錄序)」나 「대세자집교장발원소(代世子集敎藏發願疏)」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의천은 경 · 율 · 논이 갖추어졌더라도 그 장소가 없다면 법을 펼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백가(百家)의 과교(科敎)를 모아 일장(一藏)으로 만들어 삼장의 정문(正文)과 더불어 유통시킬 서원을 세우고 국내는 물론이고 송, 거란, 일본의 장소까지 수집하고 그 목록을 새로 편찬하여 교장이라고 이름하여 유통시켰던 것이다. 의천은 분명히 삼장에 대한 연구 주석서를 교장이란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교장이란 자기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속장 또는 속대장경, 속장경 등으로 오도되면서 교장에 대한 위상 정립에 많은 혼란이 따랐던 것이다.

수집과 편찬

의천이 교장(敎藏)을 수집하고 편찬하게 된 동기는 불교를 널리 펴는 데 있어 대장경에 대한 연구서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였다. 그가 19세(1073)에 쓴 「대세자집교장발원소(代世子集敎藏發願疏」가 『대각국사문집』에 실려 있는데, 의천은 “경(經)과 논(論)은 갖추어져 있지만 연구주석서인 소초(疏鈔)는 결여되었으므로 고금의 요(遼)나라와 송나라에 있는 백가(百家)의 과교(科敎)를 일장(一藏)으로 모아 유통케 하고자 합니다”라고 발원하였다.

의천은 그 후 20년 동안 장소(章疏)를 수집했는데 본격적으로 수집활동을 한 시기는 1085년 4월에 임금어머니인 왕후에게 편지를 남기고 송나라에 들어간 14개월 동안이다. 송나라에 있으면서 50여 명의 고승을 만나 각종 교리 문답을 하였고 1086년에 귀국할 때는 『화엄대부사의론』 등 여러 종파의 교장 3천여 권을 수집하여 귀국하였다. 의천은 귀국 후에도 송나라에서 사귀었던 고승들과 계속 연락하면서 국내에 없는 장소 수집을 계속하였고 요 나라와 일본에까지 두루 수집하여 선종 7년(1090)에 그 목록을 편찬하였다.

『대각국사문집』에 실려 있는 「신편제종교장총록서」를 보면 의천은 지승이 『개원석교록』을 편찬할 때 잘못된 것을 빼어버리고 중복된 것을 깎아 만든 가장 충실한 대장경 목록과 같은 수준의 완벽한 장소목록을 만들려고 20년 동안 노력하여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때까지 아무런 목록도 없었고 조사(祖師)들의 저술은 널리 유통되지도 못하였고 국내에 전해 오는 장소 가운데는 글자가 잘못된 것은 물론이었으며 내용이 잘못되고 빠진 것도 있었다. 그러므로 수집한 장소는 반드시 교감을 거쳤고,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의천이 정원법사에게 올리는 편지에 “편지 한 통과 손수 지으신 『화엄보현행원참의(華嚴普賢行願懺儀)』, 『대방광원각참의(大方廣圓覺懺儀)』, 『대불정수능엄참의(大佛頂首楞嚴懺儀)』, 『원인론발미록(原人論發微錄)』, 『환원관소초보해(還源觀疏鈔補解)』, 『우란분예찬문(盂蘭盆禮讚文)』, 『교의분제장과문(敎義分齊章科文)』 등 8본을 함께 넣은 책상자 하나를 받아서 돌아와 펼쳐 봄에 싫증남이 없습니다”고 하였으나, 『신편제종교장총록』에는 『화엄보현행원참의』와 『우란분예찬문』 외에는 모두 빠져 있다.

여기에서 정원법사의 저술마저도 선별하여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원(1011∼1088)은 송대 화엄의 중흥을 이룩한 인물인데 의천이 교류했던 송의 많은 승려 가운데에서도 스승으로 섬겼던 고승이다. 이러한 것은 정인법사나 학도 치수에게 주는 편지 등에서도 나타나 있는데 장소의 내용에 문제가 있으면 유통시키지 않았다. 이는 의천의 불교 교학에 대한 안목을 보여 주는 것으로 교장의 수집과 편찬에 있어 완벽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교장의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은 내용에 잘못된 부분이나 빠진 것을 교정하여 수록하였다. 이러한 수집과 편찬과정에서의 철저함은 송나라에까지 알려져 송나라 고승들로부터 내용 교감의 주문도 많이 받았다. 그는 당시 불교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교장의 목록

의천이 수집하여 간행한 교장의 내용은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 목록은 제종장소록(諸宗章疏錄), 제종교장총록(諸宗敎藏總錄), 신편교장총록(新編敎藏總錄) 등으로 불리어지며 의천록(義天錄)으로도 불리고 있다. 의천은 지승의 『개원석교록』과 같은 완벽한 수준의 장소(章疏) 목록을 만들겠다는 의지에서 송, 거란, 일본 등지에서 장소를 수집하여 철저한 교정을 거쳐 장소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하였다. 그런데 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은 그 동안 우리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가 1923년 『동양학보(東洋學報)』 제13권 제3호에 실린 지내굉(池內宏)의 「고려조의 대장경」(상)이란 논문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어 널리 알려졌다.

이 목록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의천이 입적하고 얼마 안된 시기였다. 일본의 진복사(眞福寺) 소장의 『석마가연론통현초 釋摩訶衍論通玄鈔』의 오서(奧書)에 의하면, 1105년에 인화사(仁和寺)의 선정이품(禪定二品) 친왕(親王)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청해온 것이라 한다. 현재 고산사(高山寺)에 소장되어 있는 『신편제종교장총록』은 1176년(安元 2)의 명공(明空)의 필사본이다.

『신편제종교장총록』은 경(經) · 율(律) · 논(論) 등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경전의 이름 아래에 해당 장소 이름이 나오고 그 밑에 권수(卷數), 이칭(異稱), 지은이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국내뿐 아니라 송, 요, 일본에서 구입 수집한 장소 4천8백22권의 목록이다. 교장총록은 경 · 율 · 논 삼장(三藏)의 장소를 대별하여 3권으로 나누어 배열하였다. 경부(經部)는 모두 대승경(大乘經)의 장소만 수록되어 있고, 율부(律部)는 대 · 소승률(大小乘律)의 장소가, 논부(論部)에는 대 · 소승의 논과 그리고 삼론종(三論宗), 법상종(法相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정토종(淨土宗) 계통의 제종(諸宗)의 장소와 기타가 수록되어 있다. 기타는 목록, 음의(音義), 승사(僧史), 전기류(傳記類) 등이다.

총록에서의 저자 표시는 천태설(天台說)과 간혹 00과(科), 00주(注)가 나오는 이외에는 거의가 00술(述)로 되어 있다. 그런데 권3말의 『속개원석교록(續開元釋敎錄)』, 『법원주림(法苑珠林)』,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속일체경음의(續一切經音義)』, 『대송고승전(大宋高僧傳)』, 『승사략(僧史略)』 등 최소한 6종 246권은 교장에 포함될 수 없는 대상으로 이들을 빼면 1,080종 4,576권이다. 이 가운데 『법원주림』, 『일체경음의』, 『속일체경음의』는 어떤 목록에도 보이지 않고 고려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런데 이들이 『교장총록』에 목록이 수록되어 있어 의천이 송나라나 거란 등에서 수집해 온 것이 수기스님 등에 의해서 고려대장경에 수록되었던 경로를 알 수 있다.

교장의 간행

교장의 간행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로는 현재 원각본과 번각본이 일부 남아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교장의 원각본(原刻本)은 일본국 나라 동대사(東大寺)에 있는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40권과 동경 다이도뀨문고(大東急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정원신역화엄경소(貞元新譯華嚴經疏)』 권제10 등 2종류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교장의 번각본은 대체로 조선세조간경도감에서 번각한 판본들이다. 번각본은 순천 송광사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원간기(原刊記)와 필사자와 교감자 등도 새겨져 있다.

이러한 자료에 나타나 있는 간행 기간을 조사해 보면 1092-1102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판본은 “대안8년임신세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大安八年壬申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등으로 간행 기록이 새겨져 있다. 이들을 보면 교장은 일정한 체제를 갖추고 있어 계획적으로 판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존 자료에서 보면 『신편제종교장총록』 편찬 이후의 일이 된다. 그러나 의천이 1086년 5월 말에 장소 3천 권을 구하여 송나라에서 귀국한 이후에도 송나라 고승들과 계속 교류하면서 국내에 없는 장소를 수집하는 한편, 상당량의 교장을 간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의천은 1086년 귀국 직후 흥왕사 주지로 임명되었고 1090년에 교장총록 편찬하고 1091년부터 1102년까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고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순조롭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동안 의천에게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어머니 인예태후(仁睿太后)가 1092년에 입적(入寂)하고 1094년에는 선종(宣宗)마저 돌아가자 당초 계획과는 달리 순조로운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의천은 1094년 2월에 홍원사(洪圓寺)로 옮기고 이어 5월에 해인사로 옮겼다. 1095년 겨울에 다시 흥왕사에 돌아오게 되고, 1097년에는 국청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이러한 의천의 행적을 보면 교장간행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교장의 간행은 1091년부터 본격적으로 판각하여 완간을 계획했던 것이나, 선종이 돌아가자 간행에 따른 여러 가지 일이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간행은 3종의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1086년 의천이 송나라에서 장소를 수집하여 돌아온 직후부터 1090년까지 산발적으로 간행한 것, 1091년에서 1102년까지 흥왕사(興王寺)에서 간행한 것, 금산사(金山寺), 광교원(廣敎院) 등 지방사찰에서 판각한 것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일본 동대사(東大寺)에 소장하고 있는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를 보면 거란본을 모본으로 하여 번각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거란본이 흥왕사(興王寺)에서 판각한 의천 교장의 모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본이 없는 장소는 간경도감의 중수본(重修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판하본(版下本)을 새로 작성하여 판각한 것도 있다.

의천의 교장은 대장경에 대한 연구논문을 집성하고 간행하여 유통시킨 것으로 불교교리 연구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의천 대각국사가 수집하여 간행한 교장은 고려를 축으로 송, 거란, 일본 등 동북아세아를 불교 문화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불교문화사에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자리 매김을 하여야 될 것이다.

현존본

현존하고 있는 원각본(原刻本)과 번각본(飜刻本)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원각본」 ①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권제1상-권제20하(40권) : 목판 권자본(卷子本)으로 상하단변(上下單邊) 상하간(上下間) 22.1∼23.6 cm, 장(張)크기 31.2∼31.6 x 53.9∼56.3cm에 30항 20자씩 배열. 판미제(板尾題) ; 화엄초(華嚴抄) 삼하 일(三下 一). 간기 ; 대안십년갑술세(1094)수창이년정축세(1097)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大安十年甲戌歲壽昌二年丁丑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② 정원신역화엄경소(貞元新譯華嚴經疏) 권제10 : 목판 권자본으로 상하단변 상하간 23cm, 장크기 28.9 x 54 cm에 30행 20자씩 배열. 판미제 ; 정원화엄소(貞元華嚴疏) 십일(十一). 간기 ; 수창원년을해세(1095)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壽昌元年乙亥歲(1095)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번각본」 ①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대안팔년임신세(1092)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大安八年壬申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②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 권13 · 14-대안구년계유세(1093)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大安九年癸酉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③ 금강반야경약소(金剛般若經略疏)- 수창원년갑술세(1094)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비서성해서신노영서강화엄경흥왕사태사사자신칙유교감강화엄경흥왕사태사사자신 덕선교감(壽昌元年甲戌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秘書省楷書臣魯榮書講華嚴經興王寺太師賜紫臣則瑜校勘講華嚴經興王寺太師賜紫臣德詵校勘) ④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纘述) 권1 · 2-수창원년을해세(1095)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壽昌元年乙亥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권1말; 비서성해서동정신남궁예 서(秘書省楷書同正臣南宮禮書), 권2말; 사경원서자신유후수서(寫經院書者臣柳侯樹書) ⑤ 정명경집해관중소(淨名經集解關中疏) 권3 · 4-수창원년을해세(1095)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壽昌元年乙亥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⑥ 원각예참약본(圓覺禮懺略本)권2 · 3 · 4-수창삼년정축세(1097)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壽昌三年丁丑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⑦ 금강반야경개현초(金剛般若經開玄鈔) 권4 · 5 · 6-수창사년무인세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壽昌四年戊寅歲(1098)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권4말; 장사랑상의직장동정신왕정서(將仕郞尙衣直長同正臣王鼎書), 권5말; 장사랑상사직장동정신이연서(將仕郞尙舍直長同正臣李衍書), 권6말; 장사랑사재주부동정신이호서(將仕郞司宰主簿同正臣李虎書), 강화엄경흥왕사통오대사사자사문신상원교감(講華嚴經興王寺通奧大師賜紫沙門臣尙源校勘), 강화엄경불일사자응대사사자사문신융관교감(講華嚴經佛日寺慈應大師賜紫沙門臣融觀校勘), 강화엄경불일사혜소대사사자사문신자현교감(講華嚴經佛日寺慧炤大師賜紫沙門臣滋顯校勘), 천순오년신사세(1461)조선국간경도감봉교중수(天順五年辛巳歲朝鮮國刊經都監奉敎重修) ⑧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 권9 · 10-해동전교사문의천교감(海東傳敎沙門義天 校勘), 수창오년기묘세(1099)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壽昌五年己卯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장사랑사재승동정신장모서(將仕郞司宰丞同正臣蔣髦書) ⑨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 권1-수창오년기묘세(1099)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壽昌五年己卯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⑩ 법화현론(法華玄論) 권3 · 4-건통이년임오세(1102)고려국대흥왕사봉선조조(乾統二年壬午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참고문헌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조명기, 동국문화사, 1964)
『高麗續藏雕造攷』(大屋德城, 便利堂, 1937)
「高麗朝의 大藏經」(池內宏, 『東洋學報』 13-3, 1923)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나려인쇄술의 연구』(천혜봉, 경인문화사, 1980)
「속장의 조판」(『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94)
「의천의 교장」(박상국, 『전운덕총무원장스님 화갑기념논총』,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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