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은 한국계 미국인 2세로, 미국 육군 대령 출신의 군인이다. 1919년 1월 29일에 출생하여, 2005년 12월 29일 향년 86세로 영면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전쟁 참전 영웅이자 한국·프랑스·이탈리아 등 3개국에서 최고 무공 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다. 그가 미국 및 한국 사회에서 매우 큰 존경을 받는 이유는 전쟁에서 세운 공로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사회 봉사 활동을 벌여 왔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2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아버지 김순권과 어머니 노라 고(Nora 高)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벨몬트고등학교를 거쳐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교에 들어갔지만, 1년 후 자퇴를 하고 미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였다. 제이 차 세계 대전(第二次世界大戰) 중 장교후보생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이수한 김영옥은 소위로 임관된 후 일본계 2세들로 구성된 ‘100대대’ B중대 2소대장을 맡았으며, 중위로 진급된 직후에는 미5군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전선(戰線)에 투입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볼투르노강 전투’ 및 독일의 방어선이었던 ‘구스타프 라인과 고딕 라인’ 붕괴 과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제이 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대위로 전역하였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예비역 소집 방식으로 육군에 재입대하여 한국인 유격대인 ‘배내대 유격대’를 지휘하면서 정보 수집 업무를 맡았다.
1951년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은성 무공훈장 및 동성 무공훈장을 받고 정식으로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65년 대령으로 진급한 김영옥은 1972년까지 미국 육군으로 복무하면서 미 육군 보병 학교(步兵學校) 교관, 독일 주둔 육군 대대장, 주한미군 군사 고문단 등을 역임하였다.
전역 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건강 정보 센터, 한미 연합회, 한미 박물관 등을 만드는 데 공헌하였고,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조사 위원회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도 기여하였다.
그가 미국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이유는 전쟁에서 세운 공로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 봉사 활동을 벌여 왔기 때문이다. 즉 보병의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김영옥은 직접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보호하는 한편 지속적으로 재정 지원을 하였다. 또한 휴가를 나가는 병사들에게 위문품을 들고 고아원을 방문하도록 하였으며, 인종 차별 철폐 운동도 벌였고, 미국에서 가정 폭력을 당한 아시아계 여성들을 위한 ‘아시안여성포스트홈’도 건설하는 등 봉사 활동에도 진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