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白基琓)의 정치 활동은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서부터 본격화되었다. 1972년 7월 백범사상연구소(白凡思想硏究所)를 설립하여 『항일민족론』, 『백범어록』을 출간하여 김구(金九)의 사상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에서 장준하(張俊河), 함석헌(咸錫憲) 등과 함께 유신 철폐를 위한 100만인 서명 ‘개헌청원운동본부(改憲請願運動本部)’를 발족하였으나 1974년 1월 8일 공표된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하였다는 혐의로 장준하와 함께 구속되었다가 1975년 2월에 가석방되었다. 1979년 11월 24일 직선제(直選制) 대통령 선거를 요구하는 ‘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계엄령(戒嚴令)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1985년 창립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民主統一民衆運動聯合)의 서울 지부 의장과 본부 부의장을 지냈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야 운동권 세력 일부의 추대로 독자 민중후보(民衆候補)로 출마하였다. 이 선거에서 ‘민중후보연립정부안(民衆候補聯立政府案)’을 제안하며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두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후보직을 중도에 사퇴하였다.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결성되자 고문직을 맡았다. 1992년 재야 운동권의 추대를 받아 민중후보로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노동운동 및 시민운동을 왕성하게 전개하였으며, 2000년 ‘너도 나도 일하고 올바르게 잘살자’는 노나메기 운동을 제창하였다. 이 운동은 그의 사후 백기완노나메기재단(2022년 2월)으로 계승되었다.
백기완은 다수의 시집, 평론집, 수필집, 이야기집으로 널리 알려졌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었을 때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는 대표적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가 되었다. 그 외 대표작으로 옥중 시집 『젊은 날』(1982)를 비롯해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1979), 『장산곶매 이야기 1, 2』(1993),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부심이의 엄마생각』(2005),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