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루법은 물시계를 이용해 계절에 따라 변하는 밤 시각을 절기별로 측정하고 시보하는 야간 전용 시보 체계다. 물의 흐름을 동력으로 한 물시계에 계절마다 변하는 밤 시각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야전을 사용했다. 조선 초기에는 21개 야전을 사용했고, 세종 대 한양의 일출입시각을 기준으로 한 11전법을 적용했다. 1654년 시헌력이 도입된 이후에도 대통력법을 기초로 한 11전법을 그대로 유지했다. 1745년 시헌력 시각 체계에 맞는 24전 경루법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시헌력의 박명 시각까지 완벽히 적용한 37전법은 1798년 이후이다.
성문(城門) 개폐, 궁(宮) · 성(城) 순찰, 출퇴근 등 시각의 기준을 해가 뜨고 지는 시각에 맞춰 세웠던 전통 시대에는 밤 시각을 체계화하는 것이 통치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조선시대 시각법(時刻法)은 하루를 12시 100각(조선 전기) 또는 96각(조선 후기)으로 균등하게 나누는 정시법(定時法)과 밤 시각은 계절에 따라 5경(更) 5점(點)의 길이가 변하는 부정시법인 경점법(更點法)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국가의 표준 시계로 사용했던 물시계인 보루각루(報漏閣漏: 자격루(自擊漏)]), 흠경각루(欽敬閣漏: 옥루(玉漏)]) 등에 부정시법인 경점법을 적용한 야간 전용 시보 체계가 경루법(更漏法)이다.
조선 전기 12시 100각법 체계에서 경점법은 계절에 따른 밤 길이의 변화를 반영하여 해진 후 2.5각인 혼(昏)의 시각부터 해뜨기 전 2.5각인 신(晨)까지를 5등분하여 5경(更)으로 나누었다. 다시 매 경은 5점(點)으로 세분하여 하룻밤을 25등분하였다. 겨울에는 밤이 길고 여름에는 밤이 짧은 만큼 계절마다 5경 5점도 그 길이가 변한다. 이렇게 계절마다 변하는 밤의 길이를 매일 정확히 측정하고 시보하기 위해 물시계를 사용한 경루법을 개발하였다. 일정한 물의 흐름을 동력으로 한 물시계에 계절마다 변하는 밤 시각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밤에 사용하는 잣대인 야전(夜箭)이다. 야전은 계절에 따라 밤의 길이가 변화하는 것을 반영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바꿔서 사용하였다.
야전 사용법에 대해서는 자격루의 야전 사용 지침서로 알려진 『누주통의(漏籌通義)』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자격루는 한양(漢陽)의 해 뜨고 지는 시각을 계산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의 “일출입주야진각(日出入晝夜辰刻)”을 기준으로 11개의 야전을 번갈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제1전은 동지(冬至) 첫날부터 32일까지, 그리고 하지(夏至) 후 151일부터 182일까지 연중 2회 32일씩 2회 사용한다. 제6전은 동지 후 84일부터 95일까지 12일간, 하지 후 88일부터 99일까지 12일간 사용한다. 제11전은 동지 후 150일부터 182일까지, 하지 후 첫날부터 33일까지 33일간 사용한다. 즉, 동지부터 하지까지는 1전부터 11전까지를, 다시 하지부터 동지까지는 반대로 11전부터 1전까지를 교체해 사용한다.
경루법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선명력(宣明曆)을 토대로 한 경루법을 계승하여 21개 야전을 사용하였다. 동 · 하지 때 밤의 길이가 대략 60각과 40각으로 20각 차이가 난다. 밤 시각이 1각 차이가 날 때마다 야전을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1434년(세종 16) 자격루를 제작하면서 한양의 일출입 시각에 맞춘 12전 경루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보루각기(報漏閣記)」에는 수시력(授時曆)에 근거해 밤 시각을 계산해 1개 야전에 두 개의 절기를 배분하여 12개 야전을 번갈아 사용한다고 적고 있다. 『누주통의』에서 11전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듯이, 『칠정산내편』이 완성된 1442년(세종 24) 이후 『누주통의』가 작성된 어느 시점부터 11전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1전법으로 한 경루법은 이후 300여 년 동안 바뀌지 않고 사용되었다.
1654년(효종 5) 시헌력(時憲曆)이 도입되면서 시각법은 12시 100각법에서 12시 96각법으로 바뀌었지만 경루법은 여전히 대통력법(大統曆法)에 기준한 11전법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745년(영조 21) 안국빈(安國賓)이 시헌력 시각 체계를 적용한 『누주통의』를 편찬하면서 경루법은 24전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시헌력의 박명 시각까지 완벽히 이해해 적용한 37전 경루법은 1789년(정조 13) 김영(金泳)의 『신법누주통의(新法漏籌通義)』가 편찬된 이후이다. 37전 경루법이 언제까지 사용되었는지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다. 다만, 1907년(순종 1, 융희 1)에도 삼경(三更)에 행사를 치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1908년(순종 2, 융희 2) 대한국표준시(大韓國標準時)가 시행되고 평균 태양시가 사용되면서 부정시법인 경점법이 폐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