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빈은 16세인 1714년(숙종 40) 식년시(式年試)에 음양과(陰陽科)에 급제하였으며, 1721년(경종 1) 관상감정(觀象監正)을 역임하였다. 그가 관상감의 천문학 사업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낸 것은 1742년(영조 18)부터였다. 지난해 그의 사촌 동생 안국린(安國麟)이 북경에서 일월식 계산법을 탐문하고 서적을 구해 왔으나 곧 사망하자, 그 임무가 안국빈에게 주어졌다. 이후 안국빈은 관상감 역법(曆法) 사업의 주도자로 활약하였다. 1743년(영조 19), 1744년(영조 20), 1753년(영조 29) 북경에 파견되어 이그나티우스 쾨글러(Ignatius Koegler, 중국명 戴進賢, 1680~1746) 등 청나라 천문관서 흠천감(欽天監)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로부터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과 『의상고성(儀象考成)』 등 최신 역법을 배우고 관련 서적을 구해 돌아온 뒤, 일월식 계산법, 야간 시각 체제 등 조선의 역법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749년(영조 25) 황해도 장연(長淵) 현감(縣監)에 임명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즈음에는 관품이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1759년에는 핼리 혜성(Halley彗星)과 일식 등 주요 성변(星變)을 관측하고 그에 관해 영조에게 조언하는 모습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1770년(영조 46) 5월 1일 일식의 구식례(救食禮)에 호출되어 영조에게 보고한 것이 안국빈에 관한 마지막 기록이다.
안국빈은 관상감이 주도한 여러 편찬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대부분 청나라에서 도입한 지식을 재현 · 적용하는 일이었다. 1743년에는 그의 사촌 동생 안국린이 북경에서 구해 온 쾨글러의 「황도총성도(黃道總星圖)」를 관상감이 베껴 병풍으로 제작한 「황도남북양총성도(黃道南北兩總星圖)」에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중국에서 들여온 시각 체제에 관한 서적을 탐구하고 1744년부터 1년간 많은 별을 관측하여 이듬해 8월, 야간 시각 체제를 새로이 규정한 『누주통의(漏籌通義)』를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