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의 학자 관료 박규수(朴珪壽, 1807~1876)가 제작한 지구의(地球儀)로서, 보통의 지구의와는 달리 천문 관측을 위한 장치들을 설치한 기구이다.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박규수의 문집인 『환재집(瓛齋集)』의 「지세의명병서(地勢儀銘幷序)」에 그 구조와 용법에 관한 설명이 남아있으며, 그의 친구이자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남병철(南秉哲)의 천문 서적인 『의기집설(儀器輯說)』 중의 「지구의설(地球儀說)」에도 소개되어 있다. 지세의 제작에 청나라 말 위원(魏源)의 세계 지리서인 『해국도지(海國圖志)』가 이용된 사실 등을 근거로 학자들은 박규수가 평안도 용강(龍岡) 현령(縣令), 전라도 부안(扶安) 현감(縣監)으로 근무하던 1850년(철종 1)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 박규수는 지역의 북극 고도를 측정하거나 노인성(老人星)을 관측하는 등 천문 관측에 깊은 관심을 보인 시기이기도 하다.
지세의의 제도는 먼저 구형의 지구의 표면에 『해국도지』에 담긴 지리 정보를 토대로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들을 각각의 경위도에 맞게 표기한 뒤, 각국의 옛 지명, 현재 지명, 종교 등의 지리적, 문화적 정보를 표기하였다. 지구의 외부에는 자오호(子午弧), 묘유호(卯酉弧), 적도권(赤道圈), 이차척(里差尺), 이용척(利用尺)의 측정용 원환(圓圜)과 측일표(測日表)라는 이름의 해시계가 설치되었다. 이와 같은 장치를 이용하여, 세계 각국의 시간, 기후, 각 지역 간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박규수의 지세의 제작은 제1차 아편 전쟁에서 중국의 패배로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대한 위기 의식이 높아가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으로 당시 세계 정세의 변화에 대한 그의 적극적 관심을 반영한다. 과학사적으로 천문 관측의 기능을 겸비한 지구의는 그 이전에 유사한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상당한 독창성을 보인다. 박규수는 지세의 이외에도 혼평의(渾平儀), 간평의(簡平儀) 등의 천문 기구도 제작하였고, 지세의와는 달리 이들 의기는 유물이 현재까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