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발(劉興發)은 17세기 중엽 밀양(密陽)에서 활동하였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유흥발(劉興發)에 관한 기록은 17세기 중엽의 관료이자 문신인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잠곡선생필담(潛谷先生筆譚)』에 남긴 것이 유일하다. 그에 따르면, “유흥발은 ‘밀양의 솜씨 좋은 장인[교장(巧匠)]’으로서, 일본에서 파는 자명종(自鳴鐘)을 얻어 깊이 연구한 끝에 그 움직이는 이치를 스스로 깨우치고는 그 기계를 회전하게 하여 12 시진(時辰) 모두 스스로 울리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명종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기계 시계는 서양 세력이 진출하는 16세기 중엽부터 일본과 중국에 전해졌다. 관련 소식은 조선에도 전해져 17세기 초 이수광(李睟光)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중국과 일본의 자명종에 관해 기록을 남겼다. 조선에 실물이 유입된 것은 1731년(영조 7)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鄭斗源)이 가져온 것이 기록상으로 처음이다. 유흥발은 조선의 기술자가 자명종의 구조와 작동을 터득하여 제작 운영한 가장 빠른 사례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을 경유해서 자명종을 접하였는데, 아마도 부산의 왜관(倭館)을 통해 얻은 것으로 보인다.
김육은 유흥발이 만든 시계의 구조와 작동에 대해서도 간단한 기록을 남겼다. 시계의 바깥에는 둥근 ‘윤도(輪圖)’가 있어서 12 시진이 새겨져 있었다. 매 시각마다 종 치는 횟수가 달랐는데, 자시(子時)와 오시(午時)에는 9회를 치고, 점차 줄어들어 사시(巳時)와 해시(亥時)에는 4회로 줄어들었다가, 이후 다시 늘어나는 방식이었다. 매 시의 정중(正中), 예를 들어 자정(子正)과 같은 시각에는 한 번씩만 울렸다. 김육은 “‘윤도’의 가운데에는 해와 달의 모형이 설치되어 회전하였는데, 차고 기울어짐과 운행의 늦고 빠름이 (천체의 운행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라며 감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