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방택(柳方澤)의 본관은 서령(瑞寜: 현, 충청남도 서산시)이다. 자(字)는 태보(兌甫), 호(號)는 금헌(琴軒), 시호(諡號)는 정숙(靖肅)이다. 서령부원군 류성간(柳成澗)의 7대손이다. 아버지는 류성거(柳成巨)로 장남이며 서주(瑞州) 양리촌(楊里村: 현, 서산시 무학면)에서 1320년(충숙왕 7) 4월 15일에 출생하였다. 예조판서(禮曹判書) 손사(孫俟)의 딸과 결혼하여 자녀로 3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인 류백유(柳伯濡)는 이색(李穡, 1328~1396)의 제자로서 1369년(공민왕 18)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춘추관(春秋館)에 들어가 이조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둘째 아들인 류백종(柳伯淙)은 조봉대부검교사제부정(朝奉大夫檢校使帝副正), 셋째 아들인 류백순(柳伯淳)은 대사성병조참의(大司成兵曹參議)를 지냈다. 류방택은 1402년(태종 2)에 8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충청남도 서산시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다.
류방택은 어려서부터 경학(經學)에 뜻을 두어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원리를 이해하였으며 천문과 역법(曆法)에 능통하였다.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紅巾賊)이 개성(開城)에 침입하여 역서(曆書)를 만들기 어렵게 되자 개인 자료로 직접 『사조역서(私造曆書)』를 만들어 강화병마사(江華兵馬使)가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계산한 결과가 정확하여 천문역법(天文曆法)에 대한 그의 명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에 서운관주부(書雲觀主簿)가 되었으며 1379년(우왕 5)에는 판서운관사가 되었고 1389년(창왕 1)에는 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를 겸하였다.
고려가 멸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해 있었는데, 1395년(태조 4) 12월에 고구려에서 전해진 석각(石刻)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복각하는 과정에서 별의 세차(歲差)를 계산할 수 있는 천문학자로 추대되었다. 류방택은 조선 초기에 맞도록 별의 위치를 계산하여 혼효중성(昏曉中星)이 계절에 잘 맞도록 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조선 개국의 녹권(錄券)이 내려졌으나 이를 사양하고 개성에 머물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후, 개성에서 고향인 서산에 내려와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에 삼은각(三隱閣)을 짓고 고려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13371392), 목은(牧隱) 이색과 야은 길재(冶隱吉再, 13531419)의 위패를 모시며 고려에 충절을 지켰다.
류방택은 고려 말에 서운관의 책임자로 있었으며 1395년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할 때 세차 계산을 맡아 천문도 제작에 참여하였다. 류방택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의 학문과 저술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조선 서운관에서 천문도 계산을 담당할 적임자로 류방택을 추천한 것은 당시 천문 역산(曆算)에 있어 그의 뛰어남을 짐작할 수 있다. 정이오(鄭以吾)의 『교은집(郊隱集)』에 있는 류방택의 행장기(行狀記)를 통해 고려 말에 강화병마사에게 역서를 만들어 전해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고려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詩) 두 편을 확인할 수 있다.
1404년(태종 4)에 정숙공(靜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21년(광해군 13)에 동학사의 삼은각에 삼은(三隱)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1694년(숙종 20)에는 서산의 송곡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