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0월 20부터 24일까지 개최된 조선산업경제조사회는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만주-농업, 조선-조공업, 일본-정밀 공업’이라는 제국 경제권의 구상 속에 종래 식량 생산 기지로 비정했던 조선 경제를 군수 공업 기지로 전환하는 정책을 확립하고 공표한 자리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36년 2월부터 내외 정세와 당시 조선의 일반 경제 발달에 비추어 종래의 산업 경제의 지도 방침을 재검토하고 일반 자원, 무역, 금융, 교통, 수산 등을 조사한 후 장래의 발달에 대한 유효적절한 방책을 수립하기 위해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설치를 준비했다. 8월 25일 각의에서 승인을 얻고 예산 3만 원을 확보했으며, 위원을 인선했다. 조선산업경제조사회는 회장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綠一郞) 정무총감과 위원 총 81명으로 구성되었다(결석 위원 11명).
위원은 조선총독부 관료와 일본 내각 관료, 일본측 실업가와 전문가, 조선 내 일본인 실업가와 조선인 자본가, 만주측 인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선군참모장 육군소장과 만주관동군참모, 만철이사와 만주국 관료, 도부(東武) 철도 주식 회사 사장, 리켄(理化學) 연구소장, 대장경제연구소장(大藏經濟硏究所長), 석탄광업연합회 회장 등을 위원으로 위탁한 것은 일제 제국권 내의 식민지 조선 경제를 구상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조선인 위원은 조선상업은행장 박영철(朴榮喆), 실업가 하준석(河駿錫)(이상 제1분과회),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사장 한상룡(韓相龍), 경성방직주식회사 사장 김연수(金秊洙)(이상 제2분과회),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전무 원덕상(元悳常), 실업가 김능수(金能秀)(이상 제3분과회) 등 6명이었다. 박영철과 한상룡은 제3분과 회의에도 번외로 참가했고, 한상룡은 제4분과 회의에도 참석했다. 조선산업경제조사회는 1921년 9월 49명으로 구성된 조선산업조사위원회보다 규모가 컸다.
1936년 8월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이 교체되는 정치적 변동에도 산업경제조사회는 예정대로 10월에 개최되었다. 각 분과는 4개로 구성되어, 제1분과회: 농림 수산업, 제2분과회: 광물 자원과 동력 자원, 공업, 제3분과회: 상업과 무역, 교통, 금융, 제4분과회: 산업 교육, 일반 사항 등을 심의했다. 의사 진행 일정을 보면, 첫 날인 20일에는 총회에서 분과회 및 소속 위원을 결정하고 전체 토의를 했으며, 2123일에는 제1, 제2, 제3분과별 회의가 열렸고, 2324일에는 제4분과 회의가 진행되었다. 24일 마지막 날에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각 분과회 보고 후 답신안을 의결하고 폐회했다.
조선산업경제조사회에서 결정된 답신은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자문답신서』로 작성되었는데, 그 목차는 “조선산업경제개발에 관한 일반 방침, 제1농림 수산업에 관한 건, 제2광물 자원 및 동력 자원에 관한 건, 제3공업에 관한 건, 제4상업 및 무역에 관한 건, 제5교통에 관한 건, 제6금융에 관한 건, 제7산업 교육에 관한 건 제8일반적 사항, 희망 사항”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