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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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 세공 전문 수공업자 출신으로 신행상회(信行商會)를 남대문통에 설립하고 이후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린 화신상회(和信商會)를 창립하여 경영한 기업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7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서울 남촌
주요 경력
신행상회 사장, 화신상회 사장
대표 상훈
경성박람회 은패 수상(1907), 동경 척식박람회 은패 수상(1913)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신태화는 금은 세공 전문 수공업자 출신으로 신행상회(信行商會)를 남대문통에 설립하고, 이후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린 화신상회(和信商會)를 창립하여 경영한 기업가이다. 1908년 김연학과 동업으로 신행상회를 설립하여 이후 금은 세공 업계를 제패했다. 1918년 3월경 동업을 해제했으며, 화신상회로 상호명을 고치고 서양식 2층 건물을 신축했다. 화신상회는 포목부를 두고 잡화도 취급하여 백화점으로 운영되었다. 1930년경 대공황으로 인한 경기 침체에 유동성 위기를 맞아 박흥식의 자금을 썼다가 결국 이를 갚지 못해 화신상회를 넘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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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금은 세공 전문 수공업자 출신으로 신행상회(信行商會)를 남대문통에 설립하고 이후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린 화신상회(和信商會)를 창립하여 경영한 기업가.
인적사항

신태화는 1877년 남촌 무반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이외에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주요 활동

13세 되는 1889년 종로의 김봉기(金鳳基) 은방(銀房)에 직공으로 취직했다. 약 7년간 직공으로 일하여 마련한 40원의 자금을 기반으로 19세 되던 1895년 동현(銅峴)에 셋방을 얻고 조그만 풀무 하나를 사서 금은 세공(金銀細工) 가게를 시작했다. 갑오개혁으로 전당포 취체법(取締法)이 발표되면서 전당포가 다수 설립되었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귀금속류를 헐값으로 사들여 세공‧판매함으로써 좋은 영업 성적을 냈다. 자금 여유가 생기자 직접 전당포 영업도 시작했다.

1908년 11월 자신의 자본금 4천 원과 김연학(金然鶴)의 투자금 4천 원으로 기존의 작은 공업체를 확장하여 신행상회(信行商會)를 설립했다. 김연학은 한성어음조합 조합원, 한호농공은행 중역, 종로상업회의소 의원으로 활동한 경성 유수의 실업가였다. 신행상회가 위치한 동현 4가는 오늘날의 남대문로 2가인데, 현재도 보석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업계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신태화는 1907년 경성박람회에 출품하여 은패를 수상했다. 1913년 도쿄에서 개최된 척식박람회에도 출품하여 은패를 수상했다.

신행상회는 자본금이 1911년경 1만 5천 원으로 창립 당초보다 1.8배 정도 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호황기였던 1916년 이후 성장세의 폭이 가장 커 1919년 12월에는 자본금이 14만 원에 달했다. 직공수는 창립 초 10명 정도였으나, 1911년 이후 20~33명 정도로 증가했다. 호황 경기를 타고 신행상회는 1915년 중반 이후 공격적인 경영과 사업 확장에 나서 조선인 상권의 중심인 종로통 2정목 5번지에 지점을 설치했다. 동업자 김연학의 아들 김석규는 사립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실업계에 뜻을 두고 가업(家業)을 계승하면서, 1915년 하반기 이래 신행상회의 경영에 적극 개입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수공업체에서 시작하여 경성 내 굴지의 금은 세공 업체를 이루어낸 신태화의 입장에서 김석규와의 동업은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1918년 3월경 10년간의 동업을 끝내고 남대문 본점은 김석규, 종로 지점은 신태화가 소유하게 되었다.

신태화는 새 독립 사업체의 상호를 광신상회(廣信商會)로 명명하고, 그 개설을 알리는 몇 차례의 광고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게재했다. 그러나 광고를 낸 지 열흘도 못되어 “광신이란 상호가 부적합하다” 하여 ‘화신(和信)’으로 개정했다. 화신이란 상호는 ‘상인으로서의 상업적 인격’과 ‘직무에 대한 진충(盡忠)’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온 그가 자신의 이름 ‘화(和)’에 신뢰를 의미하는 ‘신(信)’자를 붙여 작명한 것으로 보이다. 4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등록 상표를 정하고, 화신상회의 광고 포맷을 정했다. 이때 제정된 등록 상표는 박흥식에게 인수된 후에도 약간의 수정을 거쳐 그대로 사용되었다.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1919년 1월 화신백화점 자리로 알려진 종로 2정목 3번지에 2개의 쇼윈도를 갖춘 서양식 2층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했다. 공장과 창고는 인근 인사동에 두었다.

1919년 이후 자본금은 15만 원 규모였으며, 직공수는 대략 20~40명 정도로 당시 화신상회는 “금은상(金銀商)으로 일류의 거상”으로 평가되었다.

당시 경성 상공업계에서는 전문 업종에서 출발하여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하면 잡화부를 설치하여 준백화점 형태로 확장하는 예가 많았는데, 화신상회도 1921년경 포목부를 설치하였으며 나아가 잡화도 취급했다. 1929년 조선박람회 특수를 기대하고 5만 원 가량의 많은 상품을 매입했는데, 매출 부진으로 큰 타격을 받으면서 자금 압박이 가중되었다. 서울 장안의 재력가였던 구한말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던 신태화는 대공황으로 경기가 나빠진 데다 1930년에 한규설도 사망하여 자금 압박에 몰리자,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1930년 박흥식의 자금을 썼다. 은행에서 어음 할인으로 대출받은 7만 원가량을 대부해 준 박흥식은 신태화가 부채를 제대로 갚지 못하자, 1930년 말에서 1931년 초 무렵 36만 원으로 화신상회의 일체 권리와 재고 상품을 모두 인수했다. 박흥식은 자본금 100만원으로 ‘주식회사 화신상회’로 개편하고 초기에는 화신상회의 전통 계승을 강조하기 위해 신태화를 취체역(取締役) 회장으로 추대하였으며 자신은 사장으로 취임했다. 1934년 2월 상호를 ‘주식회사화신’으로 변경하면서, 신태화는 허울뿐인 회장 자리에서 퇴진했다.

신태화는 1934년 1월경 남대문통 1정목 6번지에 “주단‧포목 기타 내외 중요 물산의 수이출입 매매, 부동산 매매, 부동산 및 동산을 담보로 하는 금융업”을 영업 내용으로 하는 태성상회(泰盛商會)를 개점했다. 1935년 3월 자본금 50만 원의 주식회사태성상회로 개편했다. 그러나 영업 부진으로 개설한 지 4년 되는 1938년 2월 폐업했다.

신태화는 1925년 8월경 이재민 8호에 구호금 80원을 기부하는 선행을 베풀었고, 중앙보육학교 설립에 재원(財源)을 기부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단행본

오미일, 『(개정판)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푸른역사, 2015)

기타 자료

박흥식, '我觀 百貨店과 連鎖店', 『삼천리』 7-6(1935. 7)
엑쓰생, '새 실업가와 새 성공가—最初資金 四十圓으로써 二十萬圓의 富를 致한 바 申泰和君', 『반도시론』 2-10(1918. 10)
金銀商主人 申泰和氏談, 「廿五年回顧」, 『매일신보』 (1930.5.4)
申泰和, '商業과 人格', 『삼천리』 7-7(1935. 8)
'사업성공자열전 15: 金銀商成功 京城 申泰和氏', 『동아일보』(1927.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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