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백남신이 1897년 이후 궁내부 주사, 내장원 검세관 등을 맡아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대궐에서 쓰는 물자와 군량을 조달하는 외획(外劃) 활동을 하게 되자, 17, 18세부터 부친을 보좌하여 서울에서 주10을 꾸려 나갔다. 1907년 9월경 주3 동막(東幕, 오늘날의 마포구 대흥동 부근) 소재 합자상회 객주 창희조합(彰熙組合)의 조합원이었다.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1905년 화폐 재정 정리 사업 때 백인기를 ‘재능있는 청년’으로 인정하고 먼저 호출할 정도로 그의 사업적 능력은 상당히 평가받고 있었다. 메가타의 재정 고문부에서 화폐 정리 사업을 할 때 발생한 주4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경성 지역 상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1905년 설립한 한성 공동 창고회사의 주5 이사로 활동하다가 1908년 9월 자진 사퇴했다. 1906년 5월 설립된 한성 농공은행 이사로 활동했다. 1907년 7월 한일은행의 증자(增資)가 무산되자 사장 조병택에게 3만 원을 빌려 주고 그 대가로 1907년 12월 한일은행 전무로 취임했다. 조선 식산 주6 상담역(1918),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1925~1927)를 역임했다.
백인기는 한말 이후 일제 시기에 조선농업(주) 감사 · 이사, 대한권농(주) 이사, 일한가스(주) 이사, 고려요업(주) 부사장, 조선화재해상보험(주) 이사, 조선물산(주) 이사, 조선무연탄(주) 이사, 전북기업(주) 사장 등 여러 기업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토지 매입을 위한 과도한 주7, 도박과 유흥 등 낭비가 원인이 되어 1929년 1월 30만 원의 부도를 내고 도쿄에서 수개월간 도피 생활을 했다. 부친 백남신으로부터 물려받은 화성 농장을 1936년 법인화하여 합명회사 화성사(華星社)로 재조직하고, 백인기와 그 아들들을 사원으로 한 가족 주8로 운영했다.
그는 한말 호남학회 설립에 참가하여 재무부장과 경리부장으로 재정 지원을 하기도 했다. 조중응 · 윤덕영 등 친일 귀족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총재 등이 농사 개량을 표방하며 식민 농정 대민(對民) 협조 기구로 조직한 농담회(農談會)의 주9이었고, 1921년에는 조선농회(朝鮮農會) 이사로 활동했다. 1921년 일본인 유력자와 친일 조선인 거물들의 사교 모임으로 조직한 조선구락부의 주11이었으며, 또한 쟁쟁한 한일 실력자들로 구성된 경성 도시 계획 연구회의 상임 간사를 지내기도 했다. 1927년 경기도 도회 의원, 1927〜1934년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1929년에는 도쿄에 머물며 요로에 /이슈 보고함/ 도지사 임명 청원을 할 정도로 권력 지향적인 성향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