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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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성 농공은행 이사, 한일은행 전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한 기업가. 농업회사 합명회사 화성사를 설립, 경영한 대지주.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2년 2월 29일
사망 연도
1942년 5월
본관
수원(水原)
출생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주요 경력
한성농공은행 이사, 한일은행 전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조선농회(朝鮮農會) 이사, 경기도 도회 의원, 중추원 참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백인기는 일제강점기 한성농공은행 이사, 한일은행 전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한 기업가. 농업회사 합명회사 화성사를 설립, 경영한 대지주이다. 소유 재산의 대부분은 전주 아전 출신인 부친 백남신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한성공동창고회사와 한성농공은행 이사, 한일은행 전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했으며, 농업회사 합명회사화성사(華星社)를 설립한 지주였다. 경기도 도회 의원,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한성 농공은행 이사, 한일은행 전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한 기업가. 농업회사 합명회사 화성사를 설립, 경영한 대지주.
인적사항

1892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에서 지방 아전 출신으로 주1의 재산을 축적한 백남신(白南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말 탁지부 주사, 외부 참서관 등을 역임했으나 주2이었다. 어느 시기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처는 이재한(李在漢)의 딸 이윤성(李潤成, 1884년생)이다. 슬하에 명곤(命坤), 성곤(性坤) 두 아들과 창인(昌仁), 흥인(興仁) 두 딸을 두었으나, 그의 사후(死後) 사업은 계승되지 못했다.

주요 활동

부친 백남신이 1897년 이후 궁내부 주사, 내장원 검세관 등을 맡아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대궐에서 쓰는 물자와 군량을 조달하는 외획(外劃) 활동을 하게 되자, 17, 18세부터 부친을 보좌하여 서울에서 주10을 꾸려 나갔다. 1907년 9월경 주3 동막(東幕, 오늘날의 마포구 대흥동 부근) 소재 합자상회 객주 창희조합(彰熙組合)의 조합원이었다.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1905년 화폐 재정 정리 사업 때 백인기를 ‘재능있는 청년’으로 인정하고 먼저 호출할 정도로 그의 사업적 능력은 상당히 평가받고 있었다. 메가타의 재정 고문부에서 화폐 정리 사업을 할 때 발생한 주4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경성 지역 상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1905년 설립한 한성 공동 창고회사의 주5 이사로 활동하다가 1908년 9월 자진 사퇴했다. 1906년 5월 설립된 한성 농공은행 이사로 활동했다. 1907년 7월 한일은행의 증자(增資)가 무산되자 사장 조병택에게 3만 원을 빌려 주고 그 대가로 1907년 12월 한일은행 전무로 취임했다. 조선 식산 주6 상담역(1918),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1925~1927)를 역임했다.

백인기는 한말 이후 일제 시기에 조선농업(주) 감사 · 이사, 대한권농(주) 이사, 일한가스(주) 이사, 고려요업(주) 부사장, 조선화재해상보험(주) 이사, 조선물산(주) 이사, 조선무연탄(주) 이사, 전북기업(주) 사장 등 여러 기업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토지 매입을 위한 과도한 주7, 도박과 유흥 등 낭비가 원인이 되어 1929년 1월 30만 원의 부도를 내고 도쿄에서 수개월간 도피 생활을 했다. 부친 백남신으로부터 물려받은 화성 농장을 1936년 법인화하여 합명회사 화성사(華星社)로 재조직하고, 백인기와 그 아들들을 사원으로 한 가족 주8로 운영했다.

그는 한말 호남학회 설립에 참가하여 재무부장과 경리부장으로 재정 지원을 하기도 했다. 조중응 · 윤덕영 등 친일 귀족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총재 등이 농사 개량을 표방하며 식민 농정 대민(對民) 협조 기구로 조직한 농담회(農談會)의 주9이었고, 1921년에는 조선농회(朝鮮農會) 이사로 활동했다. 1921년 일본인 유력자와 친일 조선인 거물들의 사교 모임으로 조직한 조선구락부주11이었으며, 또한 쟁쟁한 한일 실력자들로 구성된 경성 도시 계획 연구회의 상임 간사를 지내기도 했다. 1927년 경기도 도회 의원, 1927〜1934년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1929년에는 도쿄에 머물며 요로에 /이슈 보고함/ 도지사 임명 청원을 할 정도로 권력 지향적인 성향이 강했다.

참고문헌

단행본

오미일, 『(개정판)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푸른역사, 2015)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 중앙편』(민족문제연구소, 2004)
『水原白氏大同譜』 12(수원백씨중앙화수회, 1997)
貴田忠衛, 『朝鮮人事興信錄』(朝鮮人事興信錄編纂部, 1935)
牧山耕藏 편, 『朝鮮紳士名鑑』(日本電報通信社京城支局, 1911)

기타 자료

「朝鮮人物觀: 靑年實業界의 泰斗白寅基氏」(『매일신보』, 1912. 12. 25)
「名望家의 一時隱遁에 關한 件」(『思想問題에 관한 調査書類 7』, 京鍾警高秘 제1317호의 1, 1929. 5)
주석
주1

만의 곱절이라는 뜻으로, 많은 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우리말샘

주3

조선 말기에서 대한 제국 때까지, 서울 안의 오서(五署) 가운데 서부(西部)를 관할하던 경무 관서. 고종 31년(1894)에 두었다가 융희 4년(1910)에 없앴다. 우리말샘

주4

돈이 잘 융통되지 아니하여 귀함. 우리말샘

주5

관청에서 내리는 명령. 우리말샘

주6

1918년에 산업 기관에 자금을 대출할 목적으로 설립한 특수 은행.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으면서 일제의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광복 이후 한국 식산 은행으로 되었다가 1952년에 한국 산업 은행에 흡수되었다. 우리말샘

주7

돈이나 물건을 꾸어 들임. 우리말샘

주8

회사의 주식이나 출자 금액의 일정 비율 이상을 친족이나 특수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만이 소유한 회사. 우리말샘

주9

어떤 행동이나 견해, 제안 따위가 옳거나 좋다고 판단하여 수긍하는 사람. 우리말샘

주10

예전에,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들의 물건을 맡아 팔거나 흥정을 붙여 주며 그들을 재워 주던 영업. 우리말샘

주11

앞장서서 어떤 일을 할 것을 주장하고 그 방안을 마련하는 사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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