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택은 한말 저포상(苧布商)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초대 한일은행장과 경성상업회의소 회두를 역임한 실업가이다. 한말 조진태(趙鎭泰)·백완혁(白完爀) 등과 함께 재계 세 원로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1906년 설립된 한일은행(韓一銀行) 초대 은행장이었고, 1907부터 1910년까지 경성상업회의소 회두를 역임했다.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중역, 한호농공은행 중역, 조선식산은행 상담역으로 활동했다.
조병택의 호는 수당(隨堂)이다.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슬하(膝下)에 아들 조영희(趙暎熙, 1895 ~)와 두 딸을 두었다. 1919년 조병택의 회갑(回甲)을 기념하여 조영희가 편집하여 출판한 『수당하술(隨堂賀述)』에는 의친왕 이강(李堈)을 비롯하여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정무총감(政務總監), 고지마 소지로[兒島總次郞] 경무총장, 오하라 신조[小原新三]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농상공부(農商工部) 장관 등 많은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들, 마쓰나가 다케키치[松永武吉] 경기도장관, 가나야 미쓰루[金谷充] 경성부윤, 그리고 황종린(黃宗麟) 중화민국(中華民國) 부영사(副領事), 로이드(Royds) 영국 총영사대리, 갈로이즈(Gallois) 프랑스 영사 등 각국 외교관, 중앙학회, 귀족들과 재계 인사들의 축사가 실려 있어 조병택의 교류 관계와 사회적 위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책의 앞 부분에는 자택인 의성로에서 찍은 가족사진, 저택 내부 전경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조병택은 조부나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없이 자수성가했다. 저포상(苧布商)으로 자산을 축적했으며,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조카로 당대 권세가였던 민영익(閔泳翊)의 신임이 돈독했다고 알려져 있다.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의하면 청일전쟁(淸日戰爭) 당시 상당한 군량을 일본군에 기부했다고 한다.
화폐정리사업으로 발생한 전황으로 인해 파산 상태에 빠진 상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1905년 설립한 한성공동창고(주) 중역, 한성어음조합(漢城手形組合) 조합원이었다. 1905년 7월 경성의 대표적 상인 30여 명이 설립한 경성상업회의소(京城商業會議所)의 조사감독, 의원, 회두(會頭)로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활동했다.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권고로 화폐정리사업으로 인해 전황을 겪은 한성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906년 한일은행(韓一銀行)을 설립할 때 은행 건축비와 설비 비용을 자신이 충당하고, 초대 은행장으로 활동했다. 은행 영업 자금을 조달받고 전무로 영입한 백인기와 수년간에 걸친 주식 분배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1912년 사임했다.
1908년 한성재목시탄(漢城材木柴炭)주식회사 찬성원, 경성융흥주식회사 대주주, 1909년 용달 회사(用達會社)인 공수(供需)주식회사 중역이었다. 1914년 2월 설립한 조선무역주식회사의 사장으로 활동했다.
조병택은 1918년 이후 조선 식산 은행(朝鮮殖産銀行)의 상담역(相談役)으로 활동했다. 조선 식산 은행의 창립이 농공은행의 합병에 의해 출발했기 때문에 옛 농공은행 중역을 상담역(相談役)으로 촉탁(囑託)했는데, 조병택은 한호농공은행의 취체역(取締役)이었기 때문에 임명되었다. 상담역은 은행 영업에 대해 연 2회 자문하는 역할이었다. 1919년 2월 설립된 조선인삼주식회사의 중역으로 활동했다.
관직은 대개 허직(虛職)으로 훈련주부, 훈련판관, 관리서(管理署) 부관리(副管理)를 지냈고 품계는 1903년(광무 7년) 종2품에 이르렀다. 1905년(광무 9년) 2월 중추원 의관으로 임명되었다. 1910년 8월 16일 ‘한일은행장 조병택’은 훈5등에 특별히 서훈(敍勳)되고, 태극장을 하사받았다.
1921년에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인(發起人)으로 활동했다.
사회적 활동으로는 한말(韓末)에 사립 공성학교(共成學校) 설립을 주도했으며, 1913년경에는 재정이 곤란한 중앙학교 유지비를 매년 지원했다. 1922년 1월 자신이 거주하는 동대문 밖 숭인동 부근 빈민들에게 쌀과 돈을 분급하는 선심을 베풀었다.
말년에 엄비(嚴妃) 유산 문제로 엄주승(嚴柱承)과 수년간 벌인 25만 원의 토지 소송, 아들 조영희의 약속(約束) 어음 사기, 회사 투자 실패 등으로 인해 부채 독촉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1924년 9월 자살했다. 수의도 외상으로 구매하고 장례 비용도 식산 은행(殖産銀行)에서 보낸 오백 원으로 간신히 치뤘다는 매일신보 기사로 보아 완전히 파산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