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운(玄暎運)
지냈으며, 이후 귀비 엄씨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내부참리관, 시종원시종, 궁내부번역과 번역관, 궁내부예식원 번역관, 칠원군수, 중추원의관, 철도원회계과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일본 사정을 잘 알고 주한일본공사관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에는 고속으로 승진하여, 철도원감독, 군부협판, 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 육군 보병 참령, 육군 보병 참장, 군기창 제리(提理), 원수부검사총장, 군제의정관, 참모부 제1국장, 농상공부 협판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10월 의정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의 탄핵을 받아 면관(免官)되고 향리(鄕里)로 쫓겨나는 처벌을 받았으나, 4개월 만에 징계에서 특별 사면되어 육군참장에 복귀하였다. 그 뒤 1906년 8월 봉상사 제조, 1907년 태복사장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