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산문(桐裡山門)
100여 명이 넘는 문하의 제자 가운데 여선사(如禪師)가 혜철의 선풍을 계승하였고, 이어 광자 윤다(廣慈允多, 864~945)가 출현하여 신라 효공왕과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산문이 더욱 확산되었다. 『태안사지(泰安寺誌)』에는 광자대사 당시 태안사의 경제 상황을 기록한 자료가 남아 있다. 이 자료에 제시된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당시 태안사는 3천 석에 가까운 곡식과 500결에 달하는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사원전이 전남의 보성, 승주, 나주, 영광과 경남의 진주, 합천에 이르기까지 8곳에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태안사의 경제 규모와 함께 동리산문이 독자적인 산문으로 자리 잡았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혜철의 문하에는 도선(道詵)을 중심으로 한 계열이 전라남도 광양의 옥룡사를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