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둔마리벽화고분은 1971년 11월 거창읍에 거주하는 김태순과 최남식에 의해 발견된 후, 1972년 12월 9일부터 12월 17일까지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에 의해서 발굴 조사되었다. 발견 당시 봉토와 둘레돌이 심하게 훼손되었고, 도굴에 의해 부장품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암반을 남북 393㎝, 동서 318㎝의 장방형으로 굴착해 무덤구덩이를 조성하고, 그 내부에 굴식 돌방을 2기 설치하였다. 2기의 굴식 돌방은 남북 방향의 경계벽을 기준으로 동서 방향에 자리하고 있다.
돌방은 모두 널돌을 사용해 상자 형태로 조립하였다. 돌방의 입구는 남쪽에 있으며, 깬돌을 쌓은 뒤 널돌 1매로 폐쇄하였다. 경계벽은 양 돌방의 벽으로 공유되고 있으며, 중앙에는 작은 방형의 굽구멍이 뚫려 있다.
동쪽 돌방은 길이 245㎝, 너비 92㎝, 높이 90㎝이며, 서쪽 돌방은 길이 245㎝, 너비 93㎝, 높이 93㎝로 크기가 거의 비슷하다. 도굴로 인해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지만, 서쪽 돌방에서는 목관 흔적이 남아 있다.
양 돌방 벽면은 모두 회칠을 하고 천녀상(天女像), 주악상(奏樂像) 등이 그려져 있다. 동쪽 돌방의 동벽에는 천녀들이 그려져 있는데, 남쪽에 3명, 북쪽에 2명이 남아 있다. 이 사이에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모두 6명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남쪽에 그려진 인물은 전체 높이 약 50㎝의 빗어 올려 얹은머리에 둥근 테 모양의 관을 썼고, 관 양옆에 날개 장식이 뻗어 있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양쪽 귀에 귀걸이를 하고 있다. 옷은 전체적으로 풍만한 느낌을 주는데, 상의는 소매 끝을 팔목에서 잘라 매고, 하의는 발목이 꼭 끼는 형태이다. 허리에는 띠가 있는데, 한쪽 끝이 왼쪽 다리 위로 드리워져 있다.
끈을 이용해 목에 건 장구는 배까지 내려와 있으며, 오른손은 장구를 두드리고 왼손은 위로 뻗어 두드리기 위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상반신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하반신이 거의 직각으로 돌려져 있고, 오른쪽 다리를 뒤로 들어 올린 자세는 장구를 치며 춤을 추는 모습에 가깝다.
동벽 북쪽과 중앙에 그려진 인물들도 동작이나 가지고 있는 악기에 차이가 있지만, 이와 유사하다. 다만 가장 북쪽에 그려진 인물은 얼굴에 수염이 있어 남자일 가능성이 있다.
남쪽에서 두 번째 인물은 장식이 있는 화관을 착용하고 있으며, 머리 뒤쪽에는 두광(頭光)과 같은 꽃잎 모양의 테두리가 그려져 있다.
귀에는 귀걸이를 착용하고, 왼쪽 어깨로 머리카락 두 갈래를 늘어뜨렸다. 오른손은 피리를 불고 있는 듯하지만, 왼손의 위치는 확인하기 어렵다. 오른쪽 가슴에는 항아리와 같은 것이 놓여 있으며, 허리에는 띠와 같은 장식이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자세는 얼굴을 정면으로 하고, 몸은 45도 방향으로 틀어서 구름 위에 무릎을 꿇은 모습이다.
이와 유사한 인물은 서벽에도 그려져 있는데, 윗옷을 입지 않고 띠 모양의 천의가 날리고 있는 점이나 왼손에 과일을 공양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북벽에는 문자로 추정되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명확하지 않다.
서쪽 돌방의 서벽 남쪽에서 3~4명의 인물이 확인되었지만, 남아 있는 상태가 나빠서 명확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동쪽 돌방의 주악상과 유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북쪽의 인물은 수염이 묘사되어 있어 남자로 추정된다.
거창둔마리벽화고분은 하나의 무덤에 두 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 점, 도교적 색채가 강한 벽화가 그려진 점 등에서 일반적인 고려시대 무덤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무덤은 벽화의 내용이나 복식 등으로 보아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충렬왕 시기 중국 원나라에서 들어오는 도교 문화와 당시 복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