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이다. 형조좌랑을 역임한 고운(高雲)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대사간을 역임한 고맹영(高孟英)이다.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며, 어머니 울산김씨(蔚山金氏)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큰형 고종후(高從厚)는 아버지 고경명이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이후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을 조직하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둘째 형 고인후(高因厚)는 아버지 고경명과 함께 금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첫째 부인 청해이씨(靑海李氏)는 이인기(李麟奇)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 행주기씨(幸州奇氏)는 기홍헌(奇弘獻)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 순절한 부친과 두 형의 충절을 기록한 『정기록(正氣錄)』을 간행하였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다음 해인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07년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1612년(광해군 4) 병조좌랑으로 재직하며 할아버지 고맹영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1615년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1616년에는 『선조실록』의 편수에 참가하였다.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재직하던 1617년 아버지 고경명의 문집인 『제봉집(霽峯集)』을 간행하였다. 1624년(인조 2)에는 고성군수(高城郡守)가 되었으나 권귀(權貴)의 집에 출입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체차(遞差)되었다.
1630년(인조 8) 동지사(冬至使)로 사행(使行)을 갔다가 다음 해 돌아왔는데, 이때의 여정을 기록한 『조천록(朝天錄)』을 남겼다. 1631년 2월 조흥빈(趙興賓)의 고변에 연루되었을 당시에 시구(詩句)의 내용으로 죄를 받았지만, 충신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용서를 받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7월 중국 사행 당시 보삼(補蔘)을 남용한 일이 발각되어 서울로 잡혀와 국문을 당하고 진주(晉州)로 이배(移配)되었다. 이후 벼슬길이 막히자 세상에 뜻을 접고 광주(光州) 향리에서 여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