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제31대 국왕.
이칭
본명
왕전(王顓)
아명
왕기(王祺)
이명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
이재(怡齋), 익당(益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30년(충숙왕 17)
사망 연도
1374년(공민왕 23)
본관
개성(開城)
주요 작품
천산대렵도
주요 관직
고려 국왕
내용 요약

공민왕은 고려 후기 제31대(재위: 1351~1374) 국왕이다. 1351년(충정왕 3) 10월에 즉위하여 1374년(공민왕 23) 9월에 시해되기까지 23년간 재위하였다. 공민왕의 재위 기간은 원나라 간섭이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가 건국되어 원명 교체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탈과 홍건적 침입으로 토지가 황폐되고 인명 손실이 커서 민생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이 같은 국내외 정세 속에서 여러 차례 개혁 정치를 추진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정의
고려 후기 제31대 국왕.
가계 및 인적 사항

공민왕의 이름은 왕전(王顓), 옛 이름은 왕기(王祺)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로, 1330년(충숙왕 17) 5월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숙왕(忠肅王)이고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이며, 충혜왕(忠惠王)의 친동생이다.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원나라 위왕(魏王) 보로테무르[孛羅帖木兒]의 딸이고, 이름은 부다시리[寶塔失里]이다. 1349년(충정왕 1) 공민왕이 원나라에 주1하고 있을 때 결혼하여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다. 공민왕의 왕비로는 이 밖에 이제현(李齊賢)의 딸 혜비(惠妃) 이씨, 종실 왕의(王義)의 딸 익비(益妃) 한씨(韓氏), 안극인(安克人)의 딸 정비(定妃) 안씨, 염제신(廉悌臣)의 딸 신비(愼妃) 염씨 등이 있다.

주요 활동

공민왕은 1341년(충혜왕 복위 2) 5월에 왕의 동생 강릉대군(江陵大君)이라는 신분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는데, 때 정승(政丞) 채하중(蔡河中) 등 30여 명이 주2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여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책봉되었고, 충목왕 사후 윤택(尹澤) 등 다수의 고려 신료들이 몽골에 글을 올려 공민왕의 즉위를 요청했으나, 고용보(高龍普)부원세력(附元勢力)의 지원을 받은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함으로써 왕위 계승에 실패했다.

그 뒤 공민왕은 그대로 원나라에서 숙위하고 있다가 1351년(충정왕 3) 원나라 황실이 외척 세력의 전횡과 국정 문란의 책임을 물어 충정왕을 폐위시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공민왕이 재위한 시기는 원나라 간섭이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가 건국되어 원명 교체의 길목에 들어선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탈과 홍건적의 침입으로 토지가 황폐되고 인명 손실이 커서 민생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이같은 국내외 정세 속에서 여러 차례 개 혁정치를 추진하여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기철(奇轍) · 권겸(權謙) · 노책(盧𩑠) 등 부원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다. 먼저 5월 18일에 주3를 혁파하고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였다. 6월 4일에는 인당(印璫)이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3참(站)을 공격하여 이를 고려 영토에 편입하였다. 6월 26일에는 원나라 지정(至正) 연호의 사용을를 중지하여 고려가 원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선언한 다음, 사회 전반의 개혁을 표방하는 개혁교서를 반포하여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1359년(공민왕 8) 11월 홍건적(紅巾賊) 침입에서부터 1364년(공민왕 13) 9월 원나라의 덕흥군(德興君) 옹립이 분쇄되기까지 5년 동안 벌어진 몇 차례의 외침과 반란은 공민왕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계속되는 왜구 침탈,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 침입, 국왕의 안동 주4, 정세운(鄭世雲) · 이방실(李芳實) · 안우(安祐) · 김득배(金得培) 등 살해 사건, 김용(金鏞)의 흥왕사(興王寺)의 주5, 원나라의 덕흥군 옹립과 최유(崔濡)의 침입 등 일련의 외침과 내란은 공민왕의 왕위를 위협하면서 국정 운영의 동력을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민생 문제를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게 하였다.

공민왕은 이 같은 정치적 위기 국면을 신돈(辛旽)을 기용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세신대족(世臣大族)’ ‘초야신진(草野新進)’ ‘유생(儒生)’ 출신 등 기존 정치 세력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던 공민왕은 1365년(공민왕 14) 2월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이 같은 선택을 앞당겼다. 공민왕은 1365년 5월 신돈을 기용하면서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최영(崔瑩) 등 무장 세력을 숙청하여 왕권 강화의 기반을 마련한 다음, 신돈이 주도하는 개혁 정치를 지원하였다.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토지 문제의 해결과 교육 개혁, 관료 체제의 정비에 역점을 두었다. 토지 문제의 해결은 권력층이 탈점한 토지의 환수와 천민에 대한 속량 조치를 표방한 전민변정사업(田民辨正事業)으로 나타났으며, 교육 개혁은 국학 중흥 사업으로 가시화되었다. 아울러 산관(散官)에 대한 통제와 순자격제(順資格制)의 실시를 통해 관료 체제의 정비와 정치 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주6를 시행하여 권력 구조를 개편하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신돈을 기용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왕권을 강화해 온 공민왕은 1369년(공민왕 18) 초부터 국내 정치 세력의 반발과 지나친 노동력 징발에 따른 민생 문제의 악화, 새로 흥기한 명의 압력으로 다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공민왕은 이 같은 위기 국면을 친정(親政) 선언과 신돈의 숙청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왕은 1370년 10월 친정을 선언한 다음, 이듬해 7월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신돈을 수원에 유배하였다가 그곳에서 처형하였다.

공민왕은 신돈 숙청 5개월 뒤 다시 개혁 교서를 반포하였다. 심각한 민생 문제를 완화하는 한편 신돈 정권의 붕괴에 따라 가시화될 수 있는 왕권의 위기를 개혁 정국의 조성을 통해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사 체제를 정비하여 왜구 침입에 대비하고, 주로 문벌 출신 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명의 압력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같은 정치 목표는 1374년(공민왕 23) 9월 환관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을 비롯한 자제위 소속 관리들이 왕을 시해(弑害)함으로써 더 이상 실현될 수 없었다.

학문과 저술

공민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현전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있다. 이 밖에 「염제신상(廉悌臣像)」, 「고사위기도(高士圍棋圖)」,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이양도(二羊圖)」 등도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훈과 추모

능은 현릉(玄陵)으로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무선봉의 산중턱에 남향으로,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정릉(正陵)과 나란히 쌍무덤으로 자리잡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명사(明史)』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
『원사(元史)』

단행본

김광철, 『원간섭기 고려의 측근정치와 개혁정치』(경인문화사, 2018)
김영수, 『건국의 정치』(이학사, 2006)
홍영의, 『고려말 정치사 연구』(혜안, 2005)
민현구, 『고려정치사론』(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2004)

논문

이형우, 「공민왕대 후반의 국정운영과 주도세력」(한국중세사연구』 62, 한국중세사학회, 2020)
김난옥, 「공민왕대 후반 여명관계와 장자온 · 설사」(『사학연구』 131, 한국사학회, 2018)
이정신, 「공민왕의 죽음과 국내외 정세」(『한국사학보』 67, 고려사학회, 2017)
이익주, 「1356년 공민왕 반원정치 재론」(『역사학보』 225, 역사학회, 2015)
홍영의, 「개혁군주 공민왕」(『한국인물사연구』 18, 한국인물사연구회, 2012)
신은제, 「공민왕 즉위초 정국의 동향과 전민변정」(『한국중세사연구』 29, 한국중세사학회, 2010)
민현구, 「고려 공민왕대 중엽의 정치적 변동」(『진단학보』 107, 진단학회, 2009)
이강한, 「공민왕대 관제개편의 내용 및 의미」(『역사학보』 201, 역사학회, 2009)
김경록, 「공민왕대 국제정세와 대외관계의 전개양상」(『역사와 현실』 64, 한국역사연구회, 2007)
김당택, 「고려 공민왕초의 무장세력」(『한국사연구』 93, 한국사연구회, 1996)
주석
주1

황제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속국의 왕족들이 볼모로 가서 머물던 일. 또는 그런 지위.    바로가기

주2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 또는 그런 사람.    우리말샘

주3

고려 충렬왕 때에, 중국 원나라가 고려의 개경에 둔 관아. 원나라의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개경에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하였다가 일본 정벌 계획을 그만둔 뒤로는 이것으로 고치고, 원나라의 관리를 두어 고려의 내정을 감시하고 간섭하게 하였다.    우리말샘

주4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나다.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말샘

주5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권문세족들과 결탁한 김용(金鏞)이 흥왕사의 행궁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려 한 사건. 최영 등이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이후에 반란의 주모자로 검거된 김용은 유배지에서 처형되었다.    바로가기

주6

공민왕이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신돈(辛旽)을 등용,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몇 명의 재상만을 임명하여 운영한 정치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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