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개 ()

관개 수로
관개 수로
산업
개념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하여 농경지에 물을 인공적으로 공급하는 작업.
정의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하여 농경지에 물을 인공적으로 공급하는 작업.
개설

농작물이 자라는 데는 물이 필요하다. 특히 벼가 생육하는 데 필요한 물은 자연의 강우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이를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 공급하여 주어야 한다. 만일 물이 부족하게 되면 가뭄의 해를 입게 되어 농작물의 올바른 성장과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는 것은 작물의 생육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농토를 기름지게 하거나, 또는 땅의 온도를 높여 작물의 냉해를 막거나 경운(耕耘) 또는 제초 등의 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편, 작물은 물이 없이 자랄 수 없지만 물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아도 도리어 피해를 입는다. 즉, 비가 많이 내려 작물이 침수되거나 또는 항상 지하수위가 높은 습답(濕畓)에서는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이런 경우에는 도랑을 파서 물을 빼주면 침수나 습해를 막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농경지에서 필요 없는 물을 인공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배수(排水)라 한다.

관개와 배수는 비록 수단은 서로 다르지만 목적은 다같이 작물생육에 적합한 수분을 조절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관개와 배수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고 이것을 통칭하여 농업수리(農業水利) 또는 수리(水利)라고 한다. 우리 나라는 농경지의 조건이 대부분 관개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수리사업이라고 하면 관개만을 생각할 수 있다.

관개의 기원은 농업의 기원과 거의 때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원시생활에서 야생식물의 열매를 먹고 사는 동안에 열매가 땅에 떨어져 다시 싹이 트는 것을 발견하고, 구미에 맞는 열매를 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가뭄이 들어 이들이 말라죽거나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을 알게 되어 가까운 강물을 대주게 된 것이 곧 관개의 기원이라 하겠다. 그뒤 사람이 늘고 기름진 땅을 찾아 농사를 짓게 되자 더 많은 물이 필요하고, 또 물길도 먼 곳이 생겨 관개시설을 하게 되었다. 한편 장마가 계속되어 홍수가 지면서 배수시설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계농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지방이나, 이집트의 나일강 연안에서는 예로부터 발달된 관개 · 배수 시설을 하였다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에 아모아 사람들이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 농사를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증거로 메소포타미아 부근인 이란에서 8,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관개시설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관개시설의 유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에서 백제 초기에 논농사가 시작되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일본학자의 연구에서는 중국 강남지방에서 일본에 벼농사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라 하였다. 그런데 과거 중국문화의 전파과정으로 보아 우리 나라에 벼농사가 전해진 시기는 일본보다 앞서거나 거의 같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벼농사의 기원은 기원전 1세기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관개시설은 백제 330년(비류왕 27)에 축조한 벽골지(碧骨池)로 김제에 있으며, 그 취수장치의 초석이 남아 있다.

관개의 종류는 대상 농경지에 따라 논 관개와 밭 관개로 나뉜다. 우리 나라에서 관개용수를 개발하는 것은 논 관개에 필요한 용수량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이유로서, 첫째 벼는 담수상태(湛水狀態)에서 생육하는 작물이므로 많은 용수량이 필요하고, 둘째 우리 나라의 농업이 벼농사 위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밭 관개도 여러 가지 목적으로 할 수 있으나, 가장 보편적인 목적으로는 한해(旱害)를 막기 위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연평균 강우량을 기준으로 하여 밭에 관개하는데, 750㎜ 이상인 곳에서는 관개를 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경우 연 강우량이 약 1,274㎜나 되므로, 미국의 기준에 따르면 밭 관개가 필요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 강우량분포는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밭 관개가 불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관개에는 물이 필요하고, 그 필요한 물을 일정한 곳에 확보해 두어야 한다. 물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시설을 수원공(水源工)이라 한다. 수원공에는 저수지(댐) · 양수장(양배수장) · 보(洑) · 집수암거(集水暗渠) · 관정(管井)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또 물을 대고 빼는 데 필요한 시설을 용배수로공(用排水路工)이라 한다. 용배수로공에는 용수로 · 배수로 · 암거 · 잠관(潛管) · 수로교 · 터널 · 방수로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그리고 용배수로에서 물을 조절하기 위해 낙차공(落差工) · 제수문(制水門) · 분수문 · 분수관 · 배수문 · 배수갑문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설비가 필요하다.

관개의 역사

조선시대 이전의 관개

우리 나라 농업의 기원은 기원전 1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의 영농방법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평탄하고 습지인 삼각주지역 혹은 늪지대에서 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 뒤 인구가 늘고 중국문화가 들어오자 점차 영농기술도 발달되는 동시에 관개와 치수(治水) 등 수리사업이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뒤 4세기경에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토지국유제와 미곡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조세제도를 실시하여, 강력한 국가통치하에 권농정책을 쓰는 동시에 수리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역대 왕 가운데에서 특히 신라 일성왕 · 기루왕 · 구수왕 등은 유사(有司:단체의 사무를 맡아보는 직무)에 명하여 관개와 치수를 위한 제방을 축조하도록 하였다. 백제 비류왕 27년에 벽골지를 축조하였는데 그 안장(岸長)은 1,070보(步)나 되었고, 신라 눌지왕 13년에는 시제(矢堤)를 신축하였는데 그 안장이 2,170보가 되었다. 또, 신라의 법흥왕과 백제의 무령왕도 유사에 명을 내려 제방을 수리하고 튼튼하게 하여 농사에 힘쓰도록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도 미곡증산을 위하여 수리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즉, 790년(원성왕 6) 1월에 벽골지를 증축하는 데 전주 등 7개 고을 사람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도 정책적으로 강력히 추진되었으나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 지방토호가 대두되어 토지사유제가 파생됨에 따라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고 수리사업은 정체되었다.

그 뒤 고려왕조는 토지국유제를 재확인하고 조세제도를 재정비하여 수리사업에 힘쓰는 한편, 황무지개간을 권장하여 농경지확장에도 역점을 두었다. 이것이 후일 토지개량사업의 뿌리가 되었다.

수리사업의 추진은 현종 때와 1143년(인종 21)에 벽골지를 증축하였고, 문종 이전에 남대지를 구축하였다. 1170년(의종 24)에는 남천(南川)의 제방을 구축하고, 1195년(명종 25)에는 최정분(崔正枌)이 공검제(恭儉堤)를 개축하였다. 고종 때에는 몽고병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자, 인구 과밀과 농경지의 부족에 직면하여 해안지대에 제방을 구축하여 농경지를 확장하고 수리사업을 폈다. 이것이 오늘날 간척사업의 뿌리가 되었다.

또한, 당시의 논은 대개 하구의 저습지에 주로 분포되어 있었는데, 홍수의 피해를 자주 입게 되자 차차 높은 지대로 확장, 이동하여 산간의 계류 주변에 조성되었다. 따라서 계류를 막아서 물을 끌어쓰는 보시설(洑施設)이 점점 증가되기 시작하였다.

관개용 수차(水車)도 이미 고려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해 들어왔으나 그 이용이 별로 활발하지 못하였다 한다.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시대에까지 국력을 기울여 수축한 저수지 제방이 자주 홍수에 무너지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고의로 파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즉,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서슴지 않고 저수지나 보를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저수지 내부의 땅이 오랫동안 침전물이 쌓여 비옥한 땅이 되었기 때문에 일부러 제방을 무너뜨리고 경작하는 모경(冒耕:주인의 허락 없이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일) 풍조도 성행하였다.

고대의 수리시설을 대략 살펴보면, 조선시대와는 달리 못이나 늪에 제방을 수축하여 수원공으로 이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보시설은 별로 발달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 역사에 있어서 신라 말기까지 81회의 한발(旱魃)과 고려시대 475년간에 한해 172회, 수해 65회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과 당시의 논 분포가 대부분이 큰 하천의 하구와 삼각지 등 저습지대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 나라의 논농사는 예로부터 물 때문에 재난을 자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관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여러 방면의 노력이 행해짐에 따라 비로소 논농사가 평안도와 함경도에까지 미치게 되고, 획기적인 농업발달과 더불어 수리사업도 발달을 가져왔다.

조선시대 5백년간의 수리사업을 살펴보면, 초기인 태종과 세종대에는 집권의 강화와 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수리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태조대의 벽골지의 대보수사업을 비롯하여 세종대의 고부군(古阜郡)눌제(訥堤)의 보수사업 등이 그것이다. 그 뒤 성종대의 합덕제(合德堤)의 수축과 재령군의 전탄개거사업(箭灘開渠事業), 토천(兔川)의 축제공사 등 많은 사업이 실시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효종 · 현종 · 숙종대에는 군량미의 확보를 위하여 역대 강화유수에게 명하여 많은 방축공사가 실시되었다. 한편 현종대에는 전주와 익산평야에 삼례대천(參禮大川)의 물을 끌어들여 많은 관개면적을 확보하였다.

영조대에는 이용후생학이 발전되면서 수리사업이 더욱 발달되었다. 즉, 1740년(영조 16)에 안동읍 밑의 낙동강 제방사업, 1756년에 함경도 영흥의 방축공사, 1758년에 평안도 강동군의 유만제(柳萬堤) 축조, 1768년에 충청도 합덕지(合德池)의 준설 및 평안도 청천강 준설사업 등을 들 수 있다.

정조대에는 1795년에 수원 북쪽에 만석거, 1796년에 안양에 만안제, 1798년에 수원 남쪽에 만년제, 1799년에 수원 서쪽에 축만제(현 서호) 등 여러 개의 저수지를 축조하여 가뭄을 극복하였다.

순조 이후에는 세도정치가 심화되어 정치기강이 무너지게 됨에 따라 이러한 건설사업은 거의 행해질 수 없었고, 이미 설치된 시설도 황폐일로를 거듭하게 되었다. 다만 1854년(철종 5)에 충청북도 청원군의 혜정제(惠政堤)가 완성되었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수리시설은 산간계곡에 나무와 돌로 흐르는 물을 막아 관개하는 보가 가장 많이 설치, 사용되었다. 당시의 수리시설은 규모도 작고 기술도 매우 유치하여 축조한 뒤 곧바로 무너지기도 하였고, 저수지에는 수문도 없었으며, 보나 방조제는 주먹만한 작은 돌로 축조되기도 하였다.

또 고려시대에 이미 중국에서 수차가 들어와 효종은 수차를 관개에 이용하도록 권장하였으나, 조선 말기까지 별로 수차가 이용되지 못하고 용두레[戽斗]같은 간단한 기구가 이용될 뿐이었다.

관개시설의 구축은 개인보다 공동체나 국가기관이 담당하였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동체는 오늘날의 수리계(水利契)와 같은 것으로 시설을 축구하고 운영하였다. 국가에서는 지방의 말단 자치기관에 권농관을 두어 그로 하여금 농민을 동원하여 시설을 축구하도록 하였다. 수리사업을 시행할 때는 농한기간을 이용하였고 농민 · 군인 · 승려 등이 부역으로 동원되었다.

관개시설의 소유관계는 국가기관 · 관방 · 사찰 · 농촌공동체 · 개인 등으로 구분되었다. 시설관리는 국유일 경우 지방관리가 담당하고, 관방소유일 경우 내관이나 궁노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개인소유일 경우 대체로 양반이나 토호가 담당했는데, 이들은 흔히 농민과 공동 사용하는 시설마저도 독점하려 하였다. 관개시설은 부속토지와 함께 매매되거나 또는 수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리만이 매매되기도 하였다.

수리에 관련된 사회문제도 자주 일어났다. 수리질서가 무너지면 개인간 혹은 부락간에 물싸움이 일어났다. 물싸움 중에는 계곡 상류에 수리시설을 신축하여 하류의 용수를 탈취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가장 많았다. 뿐만 아니라 농민이나 군인들이 애써 축조한 시설을 관방이나 권세가들이 차지하려는 경우 다툼이 일어났다.

한편, 관개시설을 구축하는 데 농민을 가혹하게 동원하거나, 혹은 수세를 과중하게 징수하였을 때 생활에 위협을 받은 농민은 민란을 일으켜 반항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의 수리시설의 실태를 1918년에 조사한 결과를 통해 살펴보면 저수지가 6,300여 개, 보가 2만 700여 개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충분히 이용할 수 없는 것이었고, 관개면적은 논 총면적 154만 정보의 15%에 해당하는 23만 정보에 불과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관개

일제가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수리시설의 개수와 증축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결과, 조선시대와는 달리 수리시설의 규모가 크고 근대적인 시설로서 면모가 크게 달라졌다. 물론 수리사업은 우리들의 수난과 우리 농민의 희생으로 이루어졌으며, 결코 우리의 농업발전과 근대화를 위해서라기보다 보다 많은 착취를 하기 위한 식민지 통치수단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자기들의 이해관계와 필요성에 따라 수리사업을 마음대로 강행하거나 중단하였다. 1906년 3월 26일 대한제국 탁지부령 제3호로 <수리조합조례>가 발표된 이후 1908년 전라북도에 옥구서부수리조합을 설치한 것을 시초로 하여, 일제는 다음과 같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 관개와 배수 중심의 수리사업을 수행하였다.

① 제1기(1906∼1919) : 이 시기는 근대수리사업의 초창기라고 볼 수 있다. 1906년의 <수리조합조례>와 <국유미간지이용법>을 발판으로 하여 수리조합의 창설과 더불어 저수지 · 보(洑) 등의 관개시설과 국유의 황무지 · 간석지(干潟地) · 원야(原野) 등 미간지의 개발에 착수함으로써 제국주의적 수탈을 목적으로 한 토지개량사업이 시작되었고, 1917년에는 조선수리조합령이 공포되어 수리조합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② 제2기(1920∼1939) : 1920년에 시작된 산미증식계획은 수리사업의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은 우리 나라 쌀의 집중적 수탈을 위하여 관개개선만이 아니고 밭을 논으로 전환하고 황무지와 간척지를 개발하는 농지개량과 경종법개량을 주축으로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의 농업공황 등이 원인이 되어 1934년에 이르러 산미증식계획은 중단되었다.

1935년 이후에는 쌀값 폭락 등에 의하여 경영난에 빠진 수리조합을 정리하였고, 기존 수리조합에서는 소규모사업 및 수리시설 개선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의 사업실적으로는, 먼저 수리사업에 대한 전국적인 기본조사를 실시하여, 장기사업계획 수립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을 들 수 있다.또한, 이 기간에는 농지개량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업이 시행되어야 하였기 때문에 관계법의 개정이 있었다. 즉 <조선토지개량령>을 개정하여 수리조합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공동으로도 수리사업을 비롯한 농지개량사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이 기간에는 농지개량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업이 시행되어야 하였기 때문에 관계법의 개정이 있었다. 즉 <조선토지개량령>을 개정하여 수리조합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공동으로도 수리사업을 비롯한 농지개량사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선수리조합령>을 개정하여 수리조합의 사업시행범위를 확대하여, 수리사업 또는 방수사업 이외에 농지개량 및 농사개량사업도 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1920년에서 1930년까지는 수리사업의 전성기로서 수리시설도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즉, 시설의 규모가 대형화되고 근대화되어 사업비도 거액에 달하였다. 따라서 이 사업을 효율적으로 시행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전담기관과 기술체계의 확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근대과학의 기초 위에 확립된 농업토목기술을 적용하여, 조사 · 설계 · 시공 · 감독 · 유지관리 등에 대한 전문적인 현업대행기관으로 조선토지개량조합주식회사가 설치되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 토지개량부와 함께 이 사업을 대행하였다.

③ 제3기(1940∼1945) : 1939년의 한발로 인한 피해와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식량사정이 다시 급박하게 되자 1940년에 농사개량 위주의 증산계획에 토지개량을 추가한 형태로 증미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는 방법으로 수리조합의 활발한 운영과 사업시행을 위하여 토지개량협회를 해산시키고, 1940년 7월에 조선수리조합연합회를 설치하였다.

1942년에는 증미계획을 보강하기 위하여 증미확충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증미확충계획은 산미증식계획을 능가하는 거창한 계획이었다. 이 계획의 내용은 증미계획에서 경종법 개선에 중점을 둔 것과는 달리 수리사업을 주축으로 농지개량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사업이었다. 이 사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 이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1943년에 조선농지개발영단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점차 전쟁에서 몰리게 되자 국내자원의 대부분을 전쟁을 위해 동원하였으며, 따라서 건설사업은 자재부족 · 인력부족 · 기술부족 등으로 정체상태에 빠지게 되어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수리사업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민족항일기 36년간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수리사업이 시행된 결과 598개의 수리조합이 설치되었고, 그 관개면적은 35만6700㏊에 달하였다.

현대의 관개

① 재건기(1945∼1960) : 광복 직후에는 경제적 · 사회적인 혼란으로 인해 수리사업이 잠시 중단상태에 빠졌다. 그 뒤 미군정의 원조에 힘입어 중단된 지구를 조사하여, 단기간에 준공할 수 있는 지구에서의 재착수를 비롯하여 홍수로 인한 재해복구사업, 그리고 신규사업계획도 수립되었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사업이 중단되었다.

1952년에는 <농지개혁특별회계법>이 공포되어 사업재원이 확보되었고, 1953년에는 토지개량5개년계획이 수립되어 국제연합한국부흥위원단(UNKRA)의 지원도 받게되었다. 이리하여 수리사업은 다시 활기를 되찾고 순조롭게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 뒤 1956년부터 정부의 재정긴축정책으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게 되어 미국과 국제연합원조에 의해서 사업이 추진되었다. 따라서 신규사업보다는 계속사업을 준공 위주로 하는 한편, 소액투자로 관개효과를 거둘 수 있는 소규모사업만을 시행하였다.

이 기간에 특기할 만한 점은 기술혁신이다. 여기에는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단의 기술지원이 포함되어 있어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단의 농업토목 전문가가 우리 나라에 와서 기술을 지원하고, 또 국내기술자들도 미국에서 연수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8년부터 수리시설의 설계 · 조사방법 · 시험연구 등에 큰 변화가 일며 새로운 기술발전을 이루어 국내기술은 국제적 수준까지 접근하게 되었다.

② 부흥기(1961∼1970) : 5·16군사정변과 더불어 들어선 군사정부는 당초 수리사업보다 개간 · 간척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수리사업은 신규사업을 지양하고 계속사업은 준공으로 그치는 정책이 수립되어 전례 없이 침체되었다. 과거 695개 농지개량조합도 1군1조합의 원칙에 따라서 198개 조합으로 대폭 통합되었다.

그러나 1962년에 이은 1964년의 영남지방의 한해는 수리사업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농업용수개발에 대한 기본조사를 1964년 6월에서 1965년 6월까지 전국적으로 실시하였으며, 이에 입각하여 전천후 농업용수원 개발계획이 1965년 6월에 수립되었다. 이 계획에서 특기할 것은 지하수개발계획이고, 이는 우리 나라 농업용수개발에 새로운 국면을 제시한 것이다.

1967년과 1968년에는 영 · 호남지방에 계속하여 70년 만의 큰 가뭄이 들어 지표수가 완전히 고갈되자 물을 얻기 위해서 물찾기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동안의 지하수조사사업과 시험개발의 성과를 토대로 하여 제2차 농업용수 개발계획이 1968년 11월에 수립되었다. 그리하여 집중적인 지하수개발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며 지하수 붐이 일어났다.

그 실례로서 지하수 개발은 1965년부터 토지개량조합연합회 수자원부에서 담당하고 있었으나, 1969년 2월에 전담기구로 지하수개발공사를 신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9년부터 지표수개발은 토지개량조합연합회에서, 지하수개발은 지하수개발공사에서 각기 전담하게 되어 수자원개발이 이원화되었다.

1960년대의 수리사업을 요약하면, 초기에는 침체위기에 직면하였으나 계속되는 한발로 인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수리사업의 중요성이 재인식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전천후농업을 위하여 지표수뿐만 아니라 지하수까지 포괄하는 수자원을 종합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이 입안되었다.

그 결과 1960년대에는 수원공시설로 집수암거 · 인력관정 · 타설관정 · 기계관정 등이 새로 등장하여 수원공이 다양화되었다. 따라서 지하수개발에 대한 새로운 기술이 발전, 정착되어 갔다.

③ 확장기(1971∼1995) : 1960년대의 수리사업은 단일수원공을 설치하여 일정한 단일지역의 농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는 소규모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농업용수개발에 비교적 유리한 입지조건을 가진 지역이 많았다. 그러나 1970년대의 농업용수개발은 불리한 여건을 가진 지역을 대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업비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용수개발사업을 효율적으로 시행하려면 재래의 단일목적의 개발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개발방식이 모색되어야 했고, 이를 위하여 수립된 것이 곧 대단위농업종합개발계획이었다.

대단위농업종합개발계획이란, 한 유역을 전체사업지구로 연결시키는 것으로서, 하천의 상류부로부터 하구에 이르기까지 농지를 종합적이고 집중적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농업용수뿐만 아니라 경지정리 · 개간 · 간척 · 배수개선 등 농업기반 조성사업과 그 밖에 농촌근대화를 위한 종합개발을 지역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그 규모가 방대하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와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1970년부터 시작된 대단위사업을 개관하면, 1980년까지 완공된 지구는 금강 · 평택 · 영산강Ⅰ · 경주 · 계화도 등 5개 지구이고, 그 뒤 1995년까지 완공된 것은 창녕 · 임진 · 남강 · 낙동강 · 미호천Ⅰ · 논산 · 금강Ⅰ · 삽교천 등 8개 지구이다. 그리고 현재 시공중인 지구는 대호 · 영산강Ⅱ · 영산강Ⅲ ·1· 미호천Ⅱ · 금강Ⅱ · 영산강Ⅲ ·2· 홍보 · 화 · 새만금 등 9개 지구로서, 1997년에 준공되는 대호지구를 비롯하여 2004년에 완공될 새만금사업 등이 연차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의 수리사업은 과거와 달리 지역적 여건에 입각한 경제적 · 기술적 타당성을 검토하여 중소규모사업과 대단위사업으로 구분하여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중소규모사업에서도 과거와 같은 단일목적의 사업을 지양하고, 소유역종합개발사업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대단위사업은 농지개량사업에 대한 새로운 방향의 제시이고, 또한 선진기술도입의 계기가 되었다. 즉, 대단위사업에서 방조제공사 · 배수갑문공사 · 대형양수장시설 등에 관한 기술수준도 획기적으로 발전했고, 시공장비의 현대화 또한 괄목할 만한 것이다.

관개사업의 현황과 전망

현황

농업생산기반 조성사업의 핵심사업인 농업용수 개발사업은 1994년 말 현재 남한의 총 논 면적 127만㏊의 74%에 달하는 94만㏊를 수리답으로 조성하였으며, 이중 농업진흥지역은 64만㏊로서 총 대상 74만㏊의 87%에 달한다.

그러나 영농규모가 영세하고 경작조건이 좋지 않은 산간 지역 등 농업진흥지역 외의 농지는 총 53만㏊ 중 30만㏊에 그치고 있어 국토의 합리적인 관리면에서 더 많은 투자가 요구되고 있다.

1995년 말 현재의 각 도별 수리답율은 경기도가 67%로 가장 낮고 강원도 73%, 전라남도 72%, 전라북도 75%, 충청북도 75%, 충청남도 77%, 경상남도 79%이며 경상북도가 81%로 가장 높다.

WTO체제의 출범에 대비하여 시행된 농어촌 발전대책에는 농촌을 농업생산의 장으로부터 농업과 여타 산업이 병존하는 생활의 장으로 변모시키고, 농업을 경쟁력이 있는 산업으로 강화시키는 여러 가지 시책이 담겨 있다. 따라서 농업용수 개발사업도 농업용수와 생활용수, 공업용수 및 환경용수를 겸하여 개발하는 농어촌용수 개발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1995년 현재 조성된 수원공은 총 5만 8542개 소로서 형태별로는 저수지가 1만 8161개 소, 양배수장 5,978개 소, 취입보 1만 8425개 소와 집수암거 등이 1만 7978개 소이다. 이 중 저수지는 총 수리답의 56%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수리시설물은 규모에 따라 농지개량조합과 시 · 군이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데 수리답 91만㏊ 중 비교적 수리시설이 잘 정비된 51만㏊는 106개 농지개량조합이 관리하고, 나머지 40만㏊는 시 · 군이 관리하고 있는데 이 중 19만㏊는 농지개량계에서 담당하고 있다.

전망

앞으로의 농어촌용수 개발사업은 용수의 이용과 관리에 효율성을 기하고자 전국을 464개 소의 농어촌용수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한 용수구역은 작게는 5,000㏊ 크게는 2만 5000㏊ 가량의 대중규모 유역을 상류에서 하류까지 일관되게 관리할 수 있도록 편성되며, 평균 1만 5000㏊ 정도로서 2, 3개 면의 규모에 해당한다.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농어촌용수 10개년계획은 목표 연도를 2004년으로 하여 추진되고 있는데 수리시설 개 · 보수, 보충용수 개발, 신규용수 개발, 대단위 간척농지 개발, 농어촌생활용수 개발 및 밭용수 개발사업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중 수리시설 개 · 보수 사업은 1만 4000개 소로서 수로규모가 큰 간선 흙수로를 구조물화하고 퇴적이 심한 저수지를 준설하는 사업이다. 보충용수 개발사업은 이미 수리시설이 설치되었으나 가뭄극복 능력이 부족한 42만㏊ 중 15만㏊에 대한 보완시설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신규용수 개발사업은 농업진흥지역으로서 아직 용수가 해결되지 않은 10만㏊를 2004년까지 완전한 수리답으로 개발할 계획이며, 대단위 간척사업을 통하여 5만㏊의 우량대체농지와 하구부분의 한해상습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수와 간이상수도 등을 이용하는 농어촌 5,000개 소에 암반관정과 기존 수리시설을 연결하여 농어촌생활용수를 개발하는 계획과 더불어 11만㏊의 밭에 용수를 급수하는 밭 관개 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업에는 총 14조4200억원의 사업비가 투자될 것이다.

문제점

관개용수 개발의 문제점을 들면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용수의 부족이다. 즉, 관개용 농업용수를 지속적으로 개발하여 왔으나 아직도 용수의 부족현상으로 전국의 수리답율이 75%에 불과하다. 따라서 농업용수개발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둘째, 수리시설물의 유지관리이다. 관개용수의 수리시설물 중에서 대표적인 저수지의 경우, 현재 1만 8161개 소 중에 약 55%인 9,925개 소가 1945년 이전에 설치되어 노후화 되었으므로 준설 · 제당 보강공사 등 개 · 보수 및 유지관리가 절실한 실정이다.

셋째, 토공수로의 현대화이다. 과거에는 용수로를 토공수로로 설치하는 것이 공사비 절감에 유리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토공수로로 설치하였다. 그 예로서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는 농지개량조합 관리구역의 경우 용수로 5만 4520㎞ 중 76%인 4만 1553㎞가 아직도 토공수로로 되어 있다.

그러나 토공수로는 넓은 농지를 차지할 뿐 아니라 손실수량이 많고 수로 내의 토사가 퇴적 · 매몰되고, 제방이 붕괴되거나 수초가 무성하여 매년 준설, 개 · 보수, 제초 등 유지관리에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된다.

만일 이를 소홀히 취급하면 관개시기에 물 손실뿐만 아니라 말단부 급수 등에 많은 지장을 준다. 따라서 토공수로의 현대화를 위하여 콘크리트 구조물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넷째는 수질오염 문제이다. 관개용수는 그 수량과 함께 수질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1970년부터 금강 평택지구를 비롯하여 곳곳에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하구언(河口堰)을 설치하고 담수호를 조성하여 관개용수를 확보, 사용하게 되는데, 이들 담수호의 상류 하천의 유역에 공업단지와 축산단지 등이 조성되며 공장폐수, 축산하수, 농약오수 등 공해물질이 배출 · 유입되어 결국 담수호의 수질이 부영양화현상으로 오염되게 마련이다.

그 실례로서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시화호의 경우, 상류에 하수정화시설이 미비한 안산시와 기초적인 처리시설만을 갖춘 반월공단을 두고 있어 담수호의 자정능력만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호수의 부영양화에 따른 수질악화는 불가피하다. 이와 같이 담수호의 수질이 오염되어 마침내 관개용수의 기준치를 초과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담수호의 수질오염 방지대책이 적극적으로 강구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이조수리사연구』(이광린, 한국연구원, 1961)
『신제농업수리학』(민병섭, 향문사, 1976)
『한국농지개량사업삼십년사』(농업진흥공사, 1976)
『대단위농업개발』(농업진흥공사, 1981)
『농업기반조성사업통계연보』(농수산부, 1996)
『농림수산통계연보』(농수산부, 1996)
『농정주요지표』(농림부, 1996)
『농어촌용수10개년계획』(농림수산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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