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안(希顔). 찬성사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증조가 권교(權僑)이고, 할아버지는 권적(權勣)이며, 아버지는 중림찰방(重林察訪) 권지(權軹)이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사촌동생이다. 포천 출신.
효렴(孝廉)으로 천거를 받아 개령현감이 된 뒤 여러 군현의 수령을 지냈는데 어느 곳에서나 청렴하고 신중하다는 평을 들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광주목사로 있던 도원수 권율과 서로 연락하여 국난에 대처할 것을 기약하였다.
먼저 군사를 이끌고 전주에 도착하였으나, 관찰사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빼앗아 방어 · 조방양진(防禦助防兩陣)에 이속시키고 군량관리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6월 20일 왜적이 금산군에 이르자 그곳으로 돌아가 2백명도 못되는 병졸을 거느리고, 약간의 역졸을 거느리고 있던 제원찰방(濟源察訪) 이극경(李克絅)과 합세하여 적을 기다렸다.
한편,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 조헌(趙憲)에게도 격문을 보내어 협력하여 방어할 것을 제의하였다. 22일 왜적이 대거 내습하자 하루종일 대전하였으며, 다음날 격전 끝에 아들 권준(權晙)과 함께 순국하였다.
며칠 뒤 고경명 · 조헌도 순국하였다. 군민들이 충의에 감복하여 시신을 거두어 포천의 선영에 장사지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금산에 순의비(殉義碑)가 세워졌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