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노인금계일기』는 노인(魯認)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해 명나라로 도피한 뒤, 귀국할 때까지의 일본과 중국의 풍물을 기록한 일기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그의 후손 노준채(魯準採)의 소유이다.
현재 1책(67매)으로 남아 있는 필사본이며, 세로 33.4㎝, 가로 23.5㎝이다. 노인은 내수사 별제(內需司別提)로 있다가 고향인 전라도 나주에 가 있는 동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1597년(선조 30) 8월에 남원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중국 사람 임진혁(林震虩), 진병산(陳屛山), 이원징(李源澄) 등과 함께 탈출을 계획하여 마침내 배를 타고 중국 저우[漳州]·싱화[興化]를 거쳐 푸젠[福建]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그는 본국으로 송환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여 명나라 정부로부터 귀국 허가를 받아 돌아왔다.
이 책은 앞부분과 뒷부분이 멸실되어 완전하지가 않다. 그래서 1599년(선조 32) 2월 22일부터 그 해 6월 27일까지의 일기만이 남았다. 즉, 일본의 무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밑에서 포로 생활을 할 때부터 탈출할 때까지 우리나라의 문물제도를 그들에게 소개한 내용과 그들의 풍속, 습관 및 포로들에 대한 대우, 탈출 경위 등을 기록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그들과 생활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태와 문화에 대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중국에 표류했다가 살아온 기록으로는 최보(崔溥)의 『표해록(漂海錄)』이 있다. 일본에 포로로 갔다가 살아온 기록으로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과 정희득(鄭希得)의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 정호인(鄭好仁)의 『정유피란기(丁酉避亂記)』가 있다. 『노인금계일기』는 위의 기록들을 모두 한데 묶어 놓은 듯하다.
노인이 죽은 뒤 약 200년이 지나서 후손들이 그의 일기와 시문을 모아 『금계집』을 간행하였다. 거기에 『금계일기』에서 멸실된 전후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문집을 편찬할 당시까지는 멸실 부분이 없이 온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원본은 책의 크기나 서체 등으로 미루어볼 때, 자필본인지 아닌지 단정하기가 어렵다. 다만, 문집에 수록된 것 외에는 일기의 전모가 나타난 것이 없어, 유일본으로 인정된다. 또한 이 시기 한·중·일 삼국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