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문(金大問)의 가계와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전하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 권 46에 입전되어 간략한 관련 기록이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김대문은 신라의 귀족 가문〔貴門〕의 자제라고 하여 귀족 출신임을 알 수 있다. 704년(성덕왕 3)에 한산주(漢山州)의 도독(都督)이 되었는데, 신라의 골품제에 의하면, 주(州)의 장관은 진골만이 가능했으므로, 그는 귀족 중에서도 진골 귀족 출신이었다
관리로서의 경력은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는 사실만 전하는데, 이것을 김대문의 최후이자 최고 관직으로 본다면, 그는 문무왕대에 출생하여 신문왕대부터 관료가 되었고 성덕왕대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산주는 대략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도를 관할하였고, 그 치소(治所)가 경기도 하남시의 이성산성(二聖山城) 방면에 있었다. 8세기 초에 김재문은 지금의 하남시 지역에 파견되어 한산주의 장관직을 지낸 것이다. 그에 앞서거나 한산주 도독을 그만둔 뒤의 관력(官歷)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러한 자료 상황으로 김대문에 관해서 종래 전제주의 체제 아래서 소외된 귀족이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이는 신라 중대의 전제왕권론을 기준으로 당시의 권력 구도를 국왕 측의 왕당파와 반왕권파로 양분하여 파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대문이 왕권과 대립한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정치 활동에 관한 자료가 소략한 것은 개인의 성향이나 자료 일부가 누락하는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그를 왕권에 대립하여 진골 귀족의 이해를 대변한 인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김대문은 『 고승전』, 『 화랑세기』, 『 악본(樂夲)』, 『 한산기(漢山記)』, 『 계림잡전』 등을 지었다. 이 책들은 모두 인멸되어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일부 내용이 『삼국사기』에 인용되어 있다. 예를 들어, 김흠운(金歆運) 열전에 『화랑세기』를 인용하여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들이 화랑도에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스런 병졸들이 이로 인하여 생겼다.”라고 하였다. 김대문은 화랑도의 역사와 화랑, 낭도의 활약상에 관한 자료를 모아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이러한 『계림잡전』은 신라의 전통적인 제도와 문화에 관한 책으로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의 의미와 유래,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 설화가 이로부터 인용되어 있다. 나머지 책들은 인용된 부분조차 명기되어 있지 않아서 그 내용과 성격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름을 통해서 『고승전』은 불교 승려의 전기, 『악본』은 신라의 전통음악에 관한 서술, 『한산기』는 한산주 도독으로 재임할 시기에 수집한 한산주의 역사, 지리, 문화 등에 관한 사항을 중심으로 정리한 책이라고 짐작된다.
김대문의 유학자로서의 성격에 관해서도 논란이 있으나, 그의 저술을 놓고 보았을 때 불교 및 신라의 전통문화에 관한 지식이 깊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승의 전기는 물론이고 화랑도 역시 미륵 사상과 같은 불교 이념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는 중고기 이래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이뤄지고 있었고, 중대에 들어서 강수(强首), 설총(薛聰) 등이 활약하여 유교가 확산하고 있었으므로, 김대문 역시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를 중시할 정도로 유교 사상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