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정 ()

유교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한월당집』을 저술하였으며, 혈서로 쓴 격문으로 군중을 지휘하는 등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학자 · 독립운동가.
이칭
명옥(明玉)
한월당(寒月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5년(고종 12)
사망 연도
1954년
본관
경주(慶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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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한월당집』을 저술하였으며, 혈서로 쓴 격문으로 군중을 지휘하는 등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학자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명옥(明玉), 호는 한월당(寒月堂). 아버지는 김덕재(金德載)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 이승원(李昇遠)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昇遐) 비보를 듣고 혈서로 ‘대명의리(大明義理)’ 네 글자를 기(旗)에 써서 꽂고 대성통곡해 군중을 격동시켰으며, 이로 인해 3·1운동의 유도자가 되었다. 1919년 정초에는 왼손가락을 잘라 태극기를 그리고 가슴을 찢어 피를 내어 격문을 써서 겨레의 의거(義擧)를 촉구하였으며, 한 달 후에는 다시 가운뎃손가락을 찢어 격문을 써서 군중을 지휘·선동하였다.

3·1운동 직전 왜경(倭警)에게 납치되어 갖은 악형을 당하고 혈서와 의기(義旗), 격문 등을 모두 빼앗겼다. 그 뒤 왜경이 그를 찾아와 조선을 합병한 것은 조선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며 협조하라고 회유하자, 왜경을 몽둥이로 마구 구타하였고, 이로 인해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2년 호별세 통지서가 전달되자 남의 나라를 빼앗은 놈들이 세금까지 내라고 하냐며 노발대발하였고, 손가락을 찢어 혈서로 왜왕(倭王) 대정(大正)과 총독을 꾸짖는 한시를 썼다. 그리고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통지서와 함께 왜왕에게 보내라고 반송하였다. 1924년 전매령(專賣令)이 내려 담배 경작을 못하게 하자, 그는 팻말을 써서 꽂고 동리가 공모하여 계속 경작케 하였고, 이로 인해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1933년 행정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납치하여 강제로 삭발하려 하자, 왼손을 물어뜯어 피를 입에 물고는 왜경의 얼굴에 뿜어 거부하였다. 또한 그는 늘 상복을 입고 있었기에 항상 왜경의 감시 대상이었다. 1937년 여주 흥천면에 거주하고 있을 때 왜경이 찾아와 상복을 벗기려 하자 완강히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마구 구타당하여 허리와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으며, 이후 여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김상정은 평생 동안 항일 투쟁을 벌였으며, 왜경이 갖은 악형과 행패로 굴복시키려 했으나 불굴의 투지로 대한남아의 기개를 만 천하에 드높였다. 저서로는 『한월당집(寒月堂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고, 1990년에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월당집(寒月堂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7(국가보훈처,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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