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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삼(南鍾三)

천주교인물

 조선후기 홍문관교리·영해현감·승지 등을 역임한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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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삼 필적
이칭
증오(曾五), 연파(煙波), 중재(重齋)
분야
천주교
유형
인물
성격
순교자
성별
출생일
1817년
사망일
1866년
본관
의령(宜寧)
경력
홍문관교리
시대
조선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후기 홍문관교리·영해현감·승지 등을 역임한 순교자.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세례명 요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증오(曾五), 호는 연파(煙波) 또는 중재(重齋). 탄교(坦敎)의 아들로 충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큰집인 상교(相敎)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남인계의 농학자로 충주부사를 지낸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22세 때인 1838년(헌종 4)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영해현감(寧海縣監)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承旨)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다. 또한 고종 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므로 자연 당시의 실권자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교를 가졌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827년(순조 27)에 북경에서 영세,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도 컸으나, 스스로도 동전한문서학서(東傳漢文西學書)를 읽고 입교하여 한때는 베르뇌(Berneux) 주교를 자기 집에 숨겨 두는 등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철종 말에 이르러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점차 미묘해져 가는 가운데 만주(滿洲)의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한 러시아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점차 통상을 요구하며 자주 국경을 넘어오므로, 조정은 위기감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에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은 사태해결책을 강구하기에 부심하고 있었다.
이 때 남종삼은 홍봉주(洪鳳周)·이신규(李身逵)·김면호(金勉浩) 등 교인들과 상의하여, 국내에서 전교 중인 베르뇌·다블뤼(Daveluy) 등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려,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해야 한다는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남종삼은 이렇게 해서 러시아의 남침을 막는 동시에 쇄국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여 신앙의 자유도 구현케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방아책에 대하여 당초 관심을 가졌던 대원군이 주교 베르뇌·다블뤼와의 면담이 서울에 부재중인 관계로 지연되는 동안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북경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는 와전된 정보가 전해지자, 천주교 접근에서 천주교 박해로 돌변하여 1866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박해령을 내리게 되었다.
남종삼도 이에 프랑스 선교사 7명을 비롯한 수많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김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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