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 ()

조선시대사
문헌
조선 후기의 문신 · 실학자, 안정복이 단군 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 실학자, 안정복이 단군 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
서지적 사항

20권 20책. 필사본.

내용

본편 17권, 부록 3권으로 되어 있으며, 서술 체재는 편년체이나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형식에 의해 강(綱)과 목(目)으로 서술된 실학기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저자가 1756년(영조 32) 45세 때부터 편찬을 시작해 3년 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준비한 것은 편찬 시작 5년 전인 1751년 『자치통감강목』을 연구하면서부터이고, 그 이전 유형원(柳馨遠)의 『동사강목조례(東史綱目條例)』의 초고를 본 뒤 집필을 결심한 듯하다.

초고를 완성한 뒤 스승 이익(李瀷), 친구 윤동규(尹東奎)·이인섭(李寅燮) 등에게 서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초고를 수정 보완함으로써 편찬을 시작한 지 22년 만인 1778년에 일단 완성을 보았다. 비록 계속된 작업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22년간에 걸쳐 완성된 것이다. 서문은 자신이 직접 썼다.

책의 편찬 동기는 기왕의 우리 나라 역사서들의 서술과 연구에 대한 불만이었다. 즉, 우리 나라 역사책들은 사료의 수집이 철저하지 못했고, 서술이 요령을 잃었으며 의례(義例)에 어긋났고, 시비를 가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자료를 널리 수집해 이를 비판하고 또한 평가의 기준으로 『자치통감강목』의 범례를 정법으로 삼아 서술하려 했다. 이와 같은 기존 사서의 불완전함과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역사가의 중요한 원칙으로서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① 계통을 밝힐 것, ② 찬탈자와 반역자를 엄하게 평할 것, ③ 시비를 바르게 내릴 것, ④ 충절을 높이 평할 것, ⑤ 법제를 상세히 살필 것 등이다. 이 밖에 『동사강목』의 지리고(地理考) 서(序)에서 역사가는 강역을 먼저 알아야 역사의 성쇠를 알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책을 편찬한 또 하나의 동기로 우리 나라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 나라 사람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서간문의 견해도 주목할만하다. 이는 자국사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동사강목』의 집필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위에 언급한 역사 서술의 다섯 가지 원칙 중 앞의 네 가지는 바로 성리학적인 역사관을 반영한 것이었고, 마지막의 다섯 번째 원칙은 당시의 통치 제도를 개혁하려 한 실학 사상의 학풍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강역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당시의 역사서가 변화된 철학(성리학), 세계관, 새로운 학풍(실학), 또 새로운 역사학 연구의 성과(역사지리학) 및 당시의 시대의식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한 데에서 자국사를 새로이 쓸 생각을 굳혔다고 할 것이다.

책의 첫머리에 우선 서술 원칙인 범례와 서두의 부록으로 동사강목도(東史綱目圖)를 상·중·하로 싣고 있다. 그 중 상편은 단군기자전세지도(檀君箕子傳世之圖 : 附 衛氏)·신라삼성전세지도(新羅三姓傳世之圖 : 附 駕洛國·大伽倻國)·고구려전세지도(高句麗傳世之圖 : 附 夫餘國·渤海國)·백제전세지도·고려전세지도를 싣고 있다.

신라 이후 고려까지의 도표 뒤에는 『동국통감』 찬자가 역대 왕의 치적을 평가한 사론을 싣고 있다. 역사가는 계통을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중편은 역사 지도로서 당시의 지도, 조선·사군·삼한도·삼국초기도(三國初期圖)·고구려전성도·백제전성도·신라전성도·신라통일도·고려통일도 등을 싣고 있다.

이는 이전의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착상으로, 강역을 중시함과 아울러 역사는 지리를 전제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편은 관직 연혁도로서 삼국과 고려시대의 관직을 부서별로 변화를 파악하고 있다. 이것 역시 그의 창의적인 작업의 결과로서 통치 제도를 상세히 살피는 것이 역사에서 중요한 원칙이라는 것과 관계된다.

범례는 『자치통감강목』의 범례를 크게 답습한 임상덕(林象德)의 『동사회강(東史會綱)』의 범례를 참조해 간략하게 줄였다. 『동사강목』 범례의 특징은 정통국가(正統國家)·정통군주(正統君主)와 비정통 국가·비정통 군주에 대해 구별·서술하는 원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참고한 서적을 한 항목으로 싣고 간단한 해제를 붙였다.

본문의 내용은 강목 형식으로 서술했는데 중요한 사건을 강으로 표시하고, 그에 관련된 기사는 줄을 낮추어 목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붙여야 할 곳에는 ‘살핀다.’는 뜻의 ‘안(按)’자를 붙여 두 줄로 쓰고 있으며, 주석도 두 줄로 썼다.

그리고 본편 서술에서 기자가 동으로 와서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졌다는 기사를 첫 사건으로 강에서 다루고, 단군에 대한 내용은 그 아래의 목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서두의 전세지도(傳世之圖)나 찬자의 문집 등에 단군과 기자라는 말을 쓴 표현과 차이가 나는데 이익의 주장이 작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즉 정통 왕조를 기자조선, 마한, 통일신라, 신라 멸망 뒤의 고려로 파악하고, 마한이 멸망한 뒤의 삼국시대는 정통 국가가 없는 시대로 파악했다. 한사군의 역사도 ‘고조선’의 역사 속에서 다루었으며, 삼국 초기는 마한의 예속 하에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

이러한 서술은 성리학적 이념의 적용에 인한 역사 사실의 왜곡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통 국가의 경우에는 연대 표기에서부터 그 국가의 왕들에 대한 칭호 및 용어까지 범례의 원칙대로 서술되었다. 또 특별한 표현을 할 경우에는 그 이유를 사론으로 보충·설명했다. 또한 역사 내용을 고증하기 위해 주(註)를 달은 것이 많다.

이는 『동사강목』의 내용이 깊은 연구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의 서술에서 큰 특색을 이루는 부분은 고려 말의 정치 기사에 대한 서술 부분이다. 『고려사』에서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왕으로 다루지 않고 반역 열전에 기술했으며, 왕으로 꼭 기술해야 할 경우에는 신우(辛禑)·신창(辛昌)이라 표현했다.

편년체의 『고려사절요』나 『동국통감』에서도 모두 신우·신창으로 표현해왔다. 그러나 『동사강목』에서는 이를 정략적인 날조라 평가하면서 왕으로 표기했는데, 폐위된 왕이라 하여 폐왕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16세기 사림들의 역사 서술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을 안정복이 확고하게 반영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역사인식에 반기를 든 것이다.

본편의 서술에서 사학사적 문제가 되는 몇 가지를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 왕의 연대를 표기함에 있어서 당시에 실시되었던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는 유교적 예의 정신에 어긋나므로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되어왔다.

전자는 『삼국사기』·『삼국사절요』·『동국통감』 등의 경우이고, 후자는 권근(權近)의 『동국사략』, 홍여하(洪汝河)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등에 적용되었는데, 『동사강목』은 전자의 관례에 따르고 있다. 또한, 신라의 왕호에 대한 고유 명칭에 대해도 직서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를 왕으로 고쳐 쓴다는 주장이 대립되어왔다.

전자는 『삼국사기』·『삼국사절요』·『동국통감』의 경우이고, 후자는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권근의 『동국사략』, 16세기 박상(朴祥)의 『동국사략』 등에서 적용되었다. 『동사강목』은 직서하는 전자의 원칙에 따랐다.

삼국시대의 여왕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남자와 동일하게 기술했는데, 『삼국사절요』·『동국통감』에서는 여주(女主)로 격하시켜 기록했고, 『동사강목』에서는 정통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부록은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고이편(考異篇)으로서 여러 기록에서 내용을 다르게 전하고 있는 사료를 비교, 검토해 사실의 옳고 그름을 논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중권은 괴설변증(怪說辨證)으로 신화·설화의 기록에서 믿을 수 없는 내용임을 비판한 것이고, 하권은 잡설(雜說)과 지리고인데 특히 지리고는 강역, 옛 도읍의 현재 위치, 산과 강의 이름과 현재 위치 등을 고증한 역사지리학적 연구를 반영한 것이다. 지리고 끝에는 우리 나라의 경위도(經緯度)에 따라 같은 위도 상에 있는 중국 지명을 비교·설명했다.

안정복의 사학사상은 본서의 구성, 본문의 서술, 범례, 부록에서 찾을 수 있지만, 특히 본문에 쓰여진 사론을 통해 명확히 살필 수 있다. 사론에는 『삼국사기』·『동국사략』·『동국통감』·『고려국사』 등에 실렸던 김부식(金富軾)·권근·최보(崔溥) 등의 사론과 유형원·이익 등 실학자들이 쓴 사론이 인용된 것도 있다.

특히 『동국통감』의 사론이 수적으로는 가장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모두 ‘최보왈‘로 바꿔 쓰고 있다. 찬자 자신이 쓴 사론은 60여 편에 달하고 있는데, 대부분 도덕적인 유교 윤리을 반영하고 있어 이전 시기 사서의 경향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사론은 새로운 성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있어 주목할만하다.

그러한 예로 역사적 유적을 고증한 사론과 역사지리적인 고증을 한 사론, 우리 나라가 약소국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서술한 사론 등이 그것이다. 사론을 포함해 책 전편에 반영된 안정복의 사학사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결여한 국가는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 정통사상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위만이 왕위를 찬탈한 경우나 고려가 반역자인 궁예의 정권을 계승한 경우는 정통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정통 사상은 원칙적으로 한 국가만을 정통 국가로 인식했기 때문에 마한이 멸망할 때까지는 삼국을 열국(列國)으로 기술했으며, 신라가 멸망한 뒤의 고려를 정통국가로 파악한 것 등이 그 예이다.

마한이 멸망한 뒤의 삼국시대는 정통국가가 없는 무통(無統)의 시대로 파악했는데, 이는 『동국통감』의 서술 방식을 취한 것이다. 또한, 중국사의 정통 왕조로 한·당·송·명만을 인정하고,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한 요·금·원은 정통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둘째, 지리적 바탕 위에서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다. 즉 국가의 발전과 쇠퇴를 강역의 확장과 축소의 관계로 보았다. 우리 나라 지형이 삼면이 바다이고 한 면이 대륙에 붙어 있는 반도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가진 최초의 사가로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선린 외교를 하면서도 육군과 수군의 양성에 잠시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 나라가 약소국이 된 것은 전략적 요충인 요동(遼東)지방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논하고, 국내에서의 요충지로서는 북한산을 들고 있다.

이처럼 지리적 요소가 역사에 작용하는 힘이 크다고 인식한 그는 역사 지도의 작성과 지리적 고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역사지리학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양 지식에 의해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통치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가의 통치 여부를 통치 제도의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 데서 연유한다. 과거 제도·노비 제도·의창·상평창·군현 제도에 대해 사론을 붙이고 있다.

이는 역사가는 법제를 소상히 밝혀야 한다고 서문에서 주장한 것과 일치하며, 책의 서두에 삼국·고려 시대의 통치 제도 중 관직의 연혁과 변천을 도표로 만들어 붙인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가 스승으로 여긴 유형원·이익의 주장처럼 통치 제도 개혁을 통해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실학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넷째, 역사에서 충절을 바친 애국 명장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권력을 휘두른 자와 반역자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깎아내렸다. 그 예로 위만조선에서 한의 침략에 끝까지 항쟁한 성기(成己)와 백제의 계백(階伯) 및 끝까지 목숨을 바치며 신라군에 항쟁한 백제 옹산성(甕山城) 군사들의 충절을 높게 찬양했다.

신라에서 고려로 벼슬을 한 최언위(崔彦撝)의 죽음에 대한 기사에서 관직을 기록하지 않고 낮게 평가했으며, 마음대로 정권을 휘두른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남건(南建), 고려의 정중부(鄭仲夫)·최충헌(崔忠獻)은 스스로 높은 관직을 차지했다고 기술함으로써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역사가는 의리를 밝혀야 한다는 서문의 서술 원칙이 그대로 역사 기술에 적용된 것이다. 다섯째, 삼국의 역사발전 과정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졌다. 즉 신라는 진한 12국 중의 사로국(斯盧國)에서 점차 발전한 나라이며, 백제는 마한 국가 중 백제(伯濟)에서 발전했고, 고구려는 주몽의 건국 이전, 즉 한사군 설치 전에 이미 존재해 역사가 900년을 지속했다고 논하고 있다.

또한 삼국은 이웃의 작은 나라를 정복해 강역을 넓힘으로써 발전한 나라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삼국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는 유형원의 설을 수용해 발전시킨 것이다. 여섯째, 역사 서술에서 믿을 수 없는 자료를 배제하는 합리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신화나 설화 중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내용은 역사 기술에서 철저하게 배제했다.

이러한 사실은 부분적으로 이전의 유교적 역사가들에 의해 행해져왔으나, 그들도 신화와 설화의 전체를 부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정복은 역사 기술에서 이를 완전히 배제한 것이다. 이 역시 유형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일곱째, 역사가는 사료 수집을 광범하게 해야 좋은 역사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이전 역사가들이 몇 년 안에 역사 편찬을 끝내는 것과 달리 40여 년에 걸쳐 국내외의 사료를 수집하고, 내용이 달리 전하는 사료를 비교, 검토해 옳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택해 기술했다.

여덟째, 과거의 역사사실을 현재의 문제 의식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역사 의식을 승화시켰다. 일본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썼는바, 일본 천황과 일본 내정에 대해 서술한 최초의 역사학자라 할 수 있다. 일본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 일본의 침략이 또 있을 가능성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왜구의 침략을 막아낸 사건에 붙인 사론에서 현재의 국가 계획을 수립하고 정치를 맡은 사람이 마땅히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논했다. 또한 고려의 상례를 논하면서 현재 노비까지도 3년 상을 치른다고 하여 과거의 역사 사실을 현재 의식화하는 데 노력했다.

아홉째, 성리학 사상을 자신의 철학으로 삼았으므로 역사관은 성리학적 역사관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 주자적 예제의 견지에서 과거의 예제를 비판한 점 등이 그것이다.

이상과 같이 성리학적 입장에서 서술된 역사서로서 김부식 이래 발전된 유교적 역사관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필자가 강목 형식의 역사 서술을 시도한 점, 정통론을 강조한 점 등은 이러한 성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책이 가진 보수적인 측면이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안정복의 역사학과 역사관은 본서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18세기 한국의 역사학적, 사상적 경향을 대부분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는 당시의 사상사적 조류였던 성리학의 영향을 철저히 신봉하고 있었고 이런 역사관을 근거로 국가와 왕과 신하를 평했다.

이는 역사학적으로 볼 때 보수적인 성향이었으나 이런 역사관은 19세기 말 독립협회의 정교가 쓴 『대동역사(大東歷史)』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 한편 그의 역사학은 당시까지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해 철저한 사료의 수집과 보수적인 상태로 머물렀던 중심적 역사관으로부터 탈피해 역사를 자국 중심으로 파악했다.

역사에서 강역과 법제를 중시함으로써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실학적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는 등 새로운 점이 발견된다. 이런 경향은 단재 신채호로부터 시작된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안정복은 당시 왜란과 호란을 체험한 국가 의식의 고조, 서학(西學)의 전래로 인한 세계관의 변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의의와 평가

지금까지의 사료를 광범하게 수집해 사료를 비교, 검토한 고증학적 역사방법(考證學的歷史方法)과 기왕의 한국사에 관한 연구를 모두 수렴한 점에서 이 책을 전통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서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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