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승(汝昇), 호는 지족당(知足堂), 아버지는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박영(朴榮)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로 판관(判官) 유희필(柳希畢)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 보직되었다가 이듬 해에는 저작(著作)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김성일(金誠一)·곽재우(郭再佑) 군막에 왕래하면서 군무(軍務)에 많이 협찬했으며, 1593년에는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다가 환도(還都) 후 박사(博士)를 제수 받았다.
그 뒤에 호조좌랑(戶曹佐郞)·해주판관(海州判官)·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는데, 당시 합천에 정인홍(鄭仁弘)이 있었으나 그의 집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 6)에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종용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도 유폐시키자, 그는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축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부수찬(副修撰)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자 그 해 여름에는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죽산부사(竹山府使)·형조참의(形曹參議)·좌부승지(左副承旨)·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 등을 역임하다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임 중에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화(講和)를 반대하였다.
끝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농월정(弄月亭)을 짓고 은거(隱居)하다가, 1638년(인조 16)에 예조참판(禮曹參判)·한성좌윤(漢城左尹)·도승지(都承旨) 등에 연이어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 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