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화(朴世和)는 1834년의 함경남도 고원(高原)의 남흥(南興)에서 박기숙(朴紀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모친은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자는 연길(年吉), 아호는 의당(毅堂)이다. 8대조가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출입하였던 박경상(朴景祥)이고, 조부 박상욱(朴尙郁)은 첨사를 지낸 관료이다.
박세화는 당시 화서학파(華西學派), 간재학파(艮齋學派) 등의 학파와 비견될 만한 의당학파(毅堂學派)를 창시하였다. 1893년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895년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후에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박세화는 문생인 회당 윤응선(晦堂 尹應善)과 함께 문경(聞慶)의 산중으로 들어가 거병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제천 의진이 일어나자 1896년 2월 윤응선을 보내어 돕게 하였다. 그러나 문경에서의 거사 계획이 적에게 노출되었고 박세화도 노환으로 성사시키지 못한 채 문경 병참소(兵站所)에 체포되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윤응선과 함께 남현(南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풍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1910년 8월 국권피탈을 당하게 되자 탄식하면서 식음을 전폐하여 23일 만에 사망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