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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순(朴鎭淳)

근대사인물

 일제강점기 고려공산당 대표, 극동인민대표대회 한국대표단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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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고려공산당 대표, 극동인민대표대회 한국대표단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올긴스크군니콜라예프카 촌락(현재 파르티잔스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양반 가문에 속했던 사람으로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면서 블라디미르-알렉산드로프스크 시에 있는 상급학교에 입학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5월이동휘(李東輝)·김규면(金圭冕)·김립(金立) 등 30여 명과 함께 한인사회당과 신민단을 통합한 ‘한인사회당’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어 박애(朴愛)·이한영(李漢榮)과 함께 한인사회당의 3인사절단으로 선출, 코민테른에 파견되었다.
1919년 봄 모스크바에 도착한 3인대표단은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선언하고, 한인사회당 당원명부를 코민테른 당국에 제출하였다. 이 후 3인대표단은 한인사회당 창당대회에서 심의된 극동의 한인사회와 레닌 정부와의 관계정립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섭하였다. 이들은 거액의 선전비를 지급받았으며, 소비에트정부로부터 한인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19년 8월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극동으로 향하던 도중, 이르쿠츠크파에게 모스크바에서 지급받은 자금을 강탈당하고 그 해 11월 빈손으로 상해(上海)에 돌아왔다. 1920년 1월 중순 재차 모스크바에 파견된 박진순은 그 해 7월 19일부터 개최된 제2차 코민테른대회에서 고려공산당 대표자격으로 결의권을 행사하였다.
코민테른 제2차 대회 기록에 의하면 박진순은 총 218명의 대표명단 가운데 제78번으로 등록되어, 7월 28일 식민지 문제에 관하여 연설하였다. 1921년 5월 이동휘를 위원장으로 하는 세칭 상해파(上海派) 고려공산당 결성에 참여, 실질적인 대변자로서 중국과 일본의 공산당 결성에도 간접적 관련을 가졌다. 특히, 상해에 파견되어 있는 코민테른 원동국(遠東局) 서기 보이틴스키와도 관계를 가지고 국내공작에 손을 대었다.
1921년 말 모스크바에 도착, 1922년 1월 21일부터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1923∼1928년 모스크바대학에서 공부하고 모스크바 여러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스탈린 숙청에 휘말려 1937년 12월 테러단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1938년 3월 1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1956년 7월 소련 최고회의 결정으로 복권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 ( 마뜨베이 찌모피예비치김 저, 이준형 역,역사비평사,1990)

  • 한국공산주의운동사  (김준엽 · 김창순,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7)

  • 「고려공산당 이론가 박진순의 생애와 사상」 ( 권희영 ,『역사비평』1989년 봄)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개정 (1997년)
김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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