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응천(應千), 호는 소요당(逍遙堂). 아버지는 박승원(朴承元)이며, 어머니는 하숙보(河叔溥)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여러 번 대과(大科)에 실패하자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아래의 눌연(訥淵) 위에 정자를 짓고 소요당이라 명명하고 풍류로써 여생을 보냈다.
조정에서 학행을 듣고 감역(監役)·봉사(奉事)·사평(司評) 등의 직임을 주어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김대유(金大有)와 교분이 두터워 그와 함께 지방에 사창(社倉: 환곡을 저장하던 창고)을 설치하고 이를 이용하도록 하기도 하였으며,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처형되자 그의 문집을 불태워버렸다. 82세로 죽은 뒤 청도의 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요당일고(逍遙堂逸稿)』 5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