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은 고려 후기 밀직부사, 찬성사, 지공거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253년(고종 40) 몽골군이 춘주성(春州城)을 함락하였을 때 부모가 모두 피해를 입었다. 원 간섭기(元干涉期)에는 여려 차례 원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맡은 외교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고, 일본 원정 준비 때 김방경(金方慶)을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에 임명하게 해 몽골군 장수 흔도(忻都), 홍다구(洪茶丘)의 횡포를 막았다. 문장을 잘하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며 업무에 충실했던 인물이라는 평을 얻었다.
춘천(春川) 박씨의 시조이다. 초명은 박동보(朴東甫)이고, 자(字)는 혁지(革之)이다. 아들로는 박원굉(朴元浤), 박원비(朴元庇)가 있었다.
1227년(고종 14) 춘천의 향리 집안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전란기인 1248년(고종 35) 강도(江都)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1253년(고종 40) 9월 몽골군이 춘주성(春州城)을 함락하였을 때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몽골군의 포로로 잡혀 갔다. 강도에 있던 박항은 부모가 몽골군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을 찾기 위해 춘주성에 갔으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워 짐작으로 장사를 지낸 사람이 3백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부모의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그 후 어머니가 포로로 잡혀가 연경(燕京)에 생존해 있다는 소식들 듣고 두 번이나 구하러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었다가 충주(忠州) 지방관이 되어 치적을 인정받아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었다. 경상도와 전라도 안찰사(按察使)로 파견되어 그 치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269년(원종 10)에 우사간(右司諫)으로 몽골에 가서 원종(元宗)이 입조(入朝)한다는 것을 알렸으며, 이듬해에는 하정사(賀正使)로 또 다시 몽골에 다녀왔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충렬왕(忠烈王)이 원나라 공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맞기 위하여 서북면(西北面)에 행차하였을 때 왕을 수행하였다. 1275년(충렬왕 1) 10월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지공거(知貢擧) 한강(韓康)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최지보(崔之甫) 등을 선발하였다. 1279년(충렬 5) 6월에는 지공거로 동지공거 곽여필(郭汝弼)과 함께 조간(趙簡) · 김순(金恂) · 오잠(吳潛 · 吳祁 · 吳祈 · 吳子宣) · 권보(權溥 · 權永) · 이세기(李世基) · 이진(李瑱 · 李方衍) · 한사기(韓謝奇) 등을 뽑았다.
충렬왕 초에 승선(承宣)이 되어 인사 행정을 관장하였는데, 궐내에서 업무를 끝낸 후에야 궁궐에서 나옴으로써 인사 업무에 따른 잡음을 막았다. 그 이전에는 사저 앞에서 청탁자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1277년(충렬왕 3)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278년(충렬왕 4)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고, 그 해 왕과 공주를 수행해 원나라에 갔다가 참문학사(參文學事)가 되었다.
김주정(金周鼎) · 염승익(廉承益) · 이지저(李之氐) 등과 함께 필도치(必闍赤: 文士)가 되어 업무 처리에 참여하였고, 그해 또 왕을 수행해 원나라에 갔다.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함 · 군량 · 전쟁 무기를 징발할 때 원에서 파견된 흔도(忻都), 홍다구(洪茶丘) 등이 횡포를 일삼았다. 이에 박항은 김방경(金方慶)을 정동(征東) 도원수(都元帥)에 임명하게 해 그 횡포를 견제하였다. 제2차 일본 정벌 때 고려의 전쟁 물자 공급책과 군사 기밀에 대한 조처도 박항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문장을 잘하고 사람들을 잘 접대하며 부지런히 공무를 보아 수령으로서 그 치적에 뛰어났으나, 고집이 있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