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83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2,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 정염(丁焰) · 양사형(楊士衡) 등에 의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이 비장(裨將) 이잠(李潛)을 보내어 변사정의 부장(副將)이 되게 하였다. 그때 순찰사 권율(權慄)이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구원을 청하자 의병장 임희진(任希進)과 함께 이를 구출하였으나, 정철의 권유로 호남을 지키기 위하여 옥천으로 내려와 상수 · 선산 등지에 주둔하고 황길 · 창원 · 함안 · 성주 · 대구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다.
1593년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재외운량장(在外運糧將)에 추대되어 산음(山陰)에 가서 병곡 수백 석을 구하여 겨우 진주성에 운반하였으나 곧 성이 함락되었다. 선조에게 중흥책(中興策)을 상소하기도 하였으며, 1595년에는 첨정(僉正)으로 승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자 정염이 “변사정이 있었다면 적이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전북특별자치도 운봉(雲峰 : 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탄집(桃灘集)』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