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문신 검간(黔澗) 조정(趙挺)이 1626년(인조 4)안동 임하 천천동에 있던 처가(妻家) 문중의 99칸 가옥을 옮겨지은 것이다.
상주양진당은 조정이 1626년 처가인 안동의 천천동에 있던 가옥을 옮겨 지은 것이다.
1966년 대홍수 때 사랑채는 쓰러져 버린 이후,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안채 23칸만 남아 있다가 1980년에 실측조사 하면서 해체되었다. 이 때 가운데 칸 마룻도리에서 1807년(순존 7)에 수리하였다는 묵서명(墨書銘)이 나왔으며, 상량(上樑)의 뚫린 구멍에서는 1626년(인조 4)에 지은 사실을 기록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1981년에 전면 복원되었다.
상주양진당은 원래 정면 9칸, 측면 7칸의 ‘口’자형 맞배지붕 건물인데, 한때 건물이 완전히 해체되었으나 1981년 좌우가 약간 다른 ‘口’자형 맞배지붕으로 복원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대지가 약간 경사져 있기 때문에 건물을 땅에서 약 1m 정도 높여서 지은 다락집 형태로 되어 있다. 이런 구조는 남방식 가옥의 특징으로, 뜨거운 여름 지열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과 가까운 저지대에 위치하여 하천이 범람할 경우 집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퇴칸 전면 기둥 6개는 특이하게 마루밑 부분은 네모기둥이고 윗부분은 두리기둥으로 다듬어 세웠다.
정침은 방을 두 줄로 배치한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고 앞면은 누각형, 뒷면은 일반형인데 모두 구들을 들였다. 이는 한겨울 외부의 차가운 공기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는 북방식 구조이다.
지붕은 정침의 툇마루 상부만 겹처마로 하고 나머지는 홑처마로 하였는데, 겹처마의 경우 일반적으로 원형 서까래에 방형 부연을 얹는데 비해 양진당은 서까래를 네모지게 다듬어 부연과 같은 모습이다.
본채의 3칸 온돌방 전면과 3칸 대청 배면에 나있는 창호는 모두 중간설주가 있는 영쌍창이다.
이 집은 방이 두 줄로 나열되는 겹집의 형식을 취하면서 그 옆에 대청을 둔 것이 특색이다.
이 건물은 남방식과 북방식의 특징을 고루 갖추었다는 점에서 조선 중기 가옥의 다양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아울러 굵은 기둥을 사용했으면서도 모서리를 접어서 투박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적 성숙도를 보이고 있어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