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 ()

선사문화
개념
선사시대 돌을 깨뜨리거나 갈아서 만든 도구.
이칭
이칭
뗀석기, 타제석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석기는 선사시대 돌을 깨뜨리거나 갈아서 만든 도구를 말한다. 석기는 생업 활동의 주된 도구로서 어느 유물보다도 인류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진화를 대표한다. 절멸동물의 화석과 함께 발견된 뗀석기는 인류가 성서의 창조론보다 더 오래전에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고고학이 학문으로 성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굴포리 유적과 석장리 유적에서 발굴된 석기로 인해 구석기시대의 존재가 인정받게 되었다.

정의
선사시대 돌을 깨뜨리거나 갈아서 만든 도구.
개요

석기는 구석기시대 이래 인류가 채집과 사냥, 그리고 어로와 농경으로 식량을 마련하고 집과 옷을 짓는 등 생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도구였다. 이 밖에 나무나 뼈, 뿔 등으로 만든 도구도 있었지만 석기만큼 오래 보존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석기는 인류 문화의 진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물질 자료이며, 인간성의 진화도 추적할 수 있는 의미 깊은 유물이다.

19세기 톰센(C. J. Thomsen)은 인류의 과거를 석기, 청동기, 철기의 시대로 나누었다. 이후 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더 구분되었고, 더 뒤에 중석기시대가 추가되었다.

석기에 기초한 시대 구분은 사람이 생존하기 위한 행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현대의 총, 컴퓨터, 우주선, 휴대전화 등 모든 것은 우리의 초기 조상이 창조한 간단한 석기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기의 편년, 제작 기술과 용도, 석재의 종류와 원산지 등을 규명하는 연구가 전통고고학, 고고과학, 민족지고고학, 실험고고학, 인지과정주의고고학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뗀석기는 330만 년 전 이래 찍개[올도완 석기군, Oldowan industry]에서 주먹도끼[아슐리안 석기군, Acheulean industry], 르발루아석기(Levallois industry), 돌날석기(blade industry), 좀돌날석기(micro-blade industry)로 발달하였고, 간석기는 이미 구석기시대 후기에 등장하였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간석기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비중이 커졌지만, 뒤지개[굴지구], 흑요석제 뗀활촉, 격지자르개처럼 용도나 석재에 따라 뗀석기도 엄연히 제작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특히 간돌검 같은 무기가 새로 등장하고 목공 용구는 더욱 정교하고 다양해졌으나 뗀석기의 존재는 미미해졌다.

석기는 크게 돌을 깨뜨리고 다듬는 두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돌을 깨는 방법으로 던져떼기(throwing technique), 모루부딪쳐떼기(anvil technique), 직접떼기(direct percussion), 간접떼기(indirect percussion), 눌러떼기(pressure flaking) 등이 있으며, 여기에 단단한 돌로 된 굳은 망치(hard hammer), 나무나 뿔 같은 무른 망치(soft hammer), 그리고 모룻돌(anvil)을 활용하여 격지류를 생산하거나 몸돌석기(석핵석기, core tools)를 만들었다.

다듬기(retouch)는 밀개, 긁개, 홈날, 톱니날, 뚜르개, 새기개, 슴베찌르개, 나뭇잎찌르개 같은 격지석기[박편석기, flake tools]를 만들기 위해 격지나 돌날, 좀돌날의 날 모양과 각도를 일정하게 다듬는 것을 가리킨다. 크게 직접다듬기(direct retouch)와 눌러다듬기(pressure retouch)로 나뉘는데, 직접다듬기는 대체로 날에 수직 방향으로, 눌러다듬기는 날에 수평 방향으로 힘을 가해 작은 격지를 떼어낸다.

직접다듬기는 긁개나 밀개 등의 날에 남아 있는 자국의 모양이나 특징에 따라 비늘모양잔손질(scaled retouch), 계단식잔손질(stepped retouch), 홈날을 여러 번의 잔손질로 완성하는 방식과 한 번에 쳐서 만드는 클락토니안식 방식(Clactonian notch)으로 나뉘고, 새기개의 좁고 긴 날을 만드는 새기개식 떼기(burin blow technique)가 있다.

한편, 눌러다듬기는 나뭇잎찌르개처럼 얇으면서 가장자리가 날카롭고 뾰족한 도구를 만드는 데 쓰인다. 석기의 접합 작업은 석기의 제작 과정과 기법은 물론 유적지 안에서 구석기인의 행위를 복원하는 데 절대적이며, 발굴된 유물의 문화층 구분이 타당했는지를 검토하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예를 들면, 순천 죽내리 유적의 중기와 후기 구석기 문화층에서 발굴된 두 시대의 접합 석기는 구석기인들이 한곳에 살면서 시대별로 선택한 돌감과 제작한 석기의 종류, 그리고 제작 기법의 변화와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즉, 사용되지 않던 양질의 석재가 후대에 선택되고, 큰 격지에서 돌날로, 몸돌석기에서 격지석기로 석기 구성의 주류가 바뀌며, 정교한 도구가 증대하는 등의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약 5만 년 사이에 달라진 구석기인의 인지 능력과 석기문화의 발달을 확연히 실감할 수 있다.

석기의 재료로 쓰인 돌의 종류와 원산지 연구는 구석기인이 선호한 돌감뿐 아니라 그들의 이동 반경, 나아가 주변 집단과의 교류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유럽에서는 양질의 플린트(flint, 부싯돌)가 원산지에서 수십에서 수백 ㎞ 거리에 떨어져 있는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최근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흑요석기를 대상으로 원산지를 연구한 결과,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북도에 위치한 유적에서 발굴된 흑요석기는 석재의 원산지가 백두산인 반면, 전라남도 장흥 신북리 유적의 원산지는 백두산과 일본 규슈로 밝혀졌다. 이것은 한반도 남부 지역의 구석기인들이 백두산을 포함하는 북부 지역,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 규슈와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교류는 집단 간에 신뢰와 협력이 전제됨을 감안하면, 직선거리로 800㎞가 넘는 원거리 교류망의 존재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구석기인들이 우호적인 관계 속에 정보와 물자를 나누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석기의 기능 추정은 민족지 자료와 더불어 쓴자국(use-wears) 연구를 통해 이뤄졌다. 쓴자국 연구는 1957년에 옛 소련의 세르게이 세메노프(S. Semenov)가 처음 개척하였는데, 그는 쌍안현미경을 활용하여 석기에 남아 있는 줄자국과 윤(polish)을 보고하였다.

이후 로렌스 킬리(L. Keeley)는 고배율의 전자주사현미경을 이용하여 윤의 종류를 더 자세하게 나누었고, 그것이 나무, 뼈, 가죽, 고기, 뿔 같은 다양한 물체를 처리할 때 생기는 것임을 알아냈다. 최근 우리 학계에서도 석기에 남아 있는 쓴자국을 연구하여 구석기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다.

석기의 진위 구분과 판단 요소

가짜 석기(eoliths)의 문제는 고고학 연구의 초기에 유럽에서도 있었고, 오늘날 일본학계의 전기 구석기 논쟁도 근본적으로는 진짜와 가짜 석기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이 논란은 사람의 행위로 석기에 생긴 특징들의 기준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고체인 돌에 충격을 가하면 흔히 조가비 모양의 돌 조각이 떨어진다. 돌의 부딪친 곳에 혹(bulb)이 생기고, 거기서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는 방사선(fissures)과 더불어 물결이 퍼지듯 동심원 무늬(ripples)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옆모습을 보면 혹이 생긴 부위(proximal part)에서 맞은편 끝(distal end)으로 가면서 두께가 얇아진다(그림 1. 뗀석기의 특징 요소). 이런 흔적과 모습은 옛 사람이 석기를 제작할 때 어디를 가격하였는지 알려주는 요소들이다.

뗀석기의 겉면에는 서로 구별되는 면들, 즉 원석면[속면], 자갈면, 뗀면, 켜면[돌결면], 풍화면, 훼손면, 터진 면 등이 남아 있다. 원석면은 돌이 처음 생성되었을 때의 색깔이나 단단하기를 보이는 면이고, 자갈면(cortex)은 돌이 구르면서 닳아 생긴 면이다.

뗀면은 돌을 깨뜨렸을 때 드러난 원석면이고, 켜면은 돌 안에 들어 있는 이물질을 따라 깨어진 면으로 흔히 평평하다. 풍화면은 세월이 흐르면서 물리, 화학 작용을 받아 장석과 유리질 성분이 빠져나간 결과 색깔이 변하고 푸석푸석하게 약해진 부위이다.

훼손면은 경작이나 발굴 과정에서 도구에 의해 훼손된 부위를 가리킨다. 터진 면은 풍화를 받은 석기가 겉흙에 드러나 강한 햇볕이나 서리로 인한 열 충격(thermal shock)을 받을 때 생긴다. 이런 자국들은 유물에 미친 자연의 작용과 사람의 행위를 순서대로 구분하고, 석기 제작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추정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사람이 만든 석기는 일정한 행위가 반복된 결과로서 정형성을 띠지만, 자연 작용으로 깨진 것은 일회성 또는 우연이어서 규칙성이 관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갈의 가장자리에서 안쪽을 향해 순차적으로 깨뜨리고 잔손질하여 완성된 주먹도끼는 평면 모습이 삼각형, 심장형, 타원형 등으로 좌우 대칭, 그리고 앞뒷면이 옆 날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다. 그러나 지질 작용이나 열 충격을 받아 깨진 돌은 불규칙한 모양이며, 열 충격으로 깨진 면에는 혹, 방사선, 동심원 자국이 없다.

또한 옛 사람이 만든 석기는 오랜 세월 동안 풍화 작용을 받아 색깔이나 질감이 변하는 이른바 녹(patina)이 슬었지만, 오늘날 진짜 석기를 모방해 만든 것은 겉면의 상태가 신선하여 구별된다.

끝으로 석기의 고고학적 출토 상황(archaeological context)도 진위 구분에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구석기라면 12,000년 전 이전의 갱신세(pleistocene) 토양에서 석기의 제작, 사용, 수리, 폐기 중 하나 또는 복수의 과정이 반영된 상태로 발견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고고학계는 지난 2000년에 발각된 일본의 전기, 중기 구석기 날조사건을 계기로 반드시 발견 유물의 출토 모습과 들어낸 자리를 촬영하여 보고서에 제시하도록 하였는데, 출토 상황은 석기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뗀석기 읽기

돌을 망치로 치면 깨지는데 이때 원석에서 떨어진 것을 격지[박편, flake], 그것이 떨어져 생긴 면을 격지면[박리면, flake scars]이라고 한다. 그래서 석기의 겉면에 남아 있는 격지면의 수를 세면 얼마나 많은 횟수의 타격이 가해졌는지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타격 지점이나 방향이 어디였는지도 앞에서 언급한 혹이나 방사선, 동심원을 근거로 찾아낼 수 있다(그림 1 참조).

그뿐 아니라 격지면의 겹치는 정도를 살펴 뗀 순서도 밝힐 수 있다. 예를 들어, 격지면의 높이 차이가 뚜렷하면 낮은 쪽이 나중에 떼어진 것이다. 알다시피 석기는 돌을 겉에서 속으로 깨뜨려가며 완성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접한 격지면의 높이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울 경우, 겹친 부위에서 보다 완전한 쪽이 뒤에 생긴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붕어빵에 이빨자국이 겹쳐 있을 때 먼저보다 나중에 먹은 자국이 더 온전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식으로 석기를 가공한 횟수와 순서는 물론 나아가 제작의 목적, 그리고 제작자가 오른손잡이인지 왼손잡이인지도 구별할 수 있다. 한 예로 주먹도끼와 좀돌날의 완성 과정을 비교해 보면 좀돌날이 주먹도끼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구석기인의 뗀석기 제작 기량은 후기 구석기시대에 절정에 도달하였다.

뗀석기의 발달

가장 오래된 뗀석기는 케냐의 투르카나호(Lake Turkana) 근처에 있는 로메퀴(Lomekyi) 유적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연대는 330만 년 전으로 보고되었다. 처음의 석기는 자갈을 깨뜨려 만든 단순한 찍개와 격지였다. 그리고 180만 년 전 무렵 돌의 양면을 깨뜨려 대칭을 이루며 날카로운 날을 지닌 주먹도끼가 탄생하였다. 이후 약 20만 년경에 원하는 모양과 크기의 격지를 떼어내는 르발루아 기술이 개발되었다.

약 4만 년 전에 나란한 날을 지닌 직사각형에 가까운 돌날[석인, blades]이 널리 퍼졌다. 이것은 그 자체로 칼처럼 쓸 수 있고, 조금만 손질하면 슴베찌르개, 밀개, 새기개 같은 전문화된 도구로 전환될 수 있었다. 이 도구들을 이용하여 나무, 뿔이나 뼈를 가공하여 찌르개, 작살, 귀바늘 등을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돌날 제작 기술은 체계적이고 복합적인 도구 제작의 모체였다.

약 3만 년 전 무렵, 돌날과 모양은 같지만 너비가 12㎜ 이하로 더 소형인 좀돌날[세석인, micro-blades]이 발명되었다. 구석기인은 나무나 뿔에 홈을 파고 이것을 끼운 뒤 접착제로 붙여 창, 작살, 칼 등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끼움날도구[모듬연장, composit tools]를 만드는 데 있어 좀돌날은 미늘이나 칼날의 역할을 하는 표준화된 부품이었다.

구석기인은 좀돌날몸돌을 지니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좀돌날을 떼어 몸체에 고정하면 원하는 도구를 바로 만들 수 있고 사용하다 파손된 날은 즉시 교체할 수 있었다. 이 기술은 후기 구석기인이 빙하극성기의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뗀석기의 시대별 변화 양상을 보면, 첫째, 후대로 갈수록 석기군의 구성에서 찍개, 주먹도끼, 주먹찌르개 같은 큰 종류보다 밀개, 긁개, 톱니날, 뚜르개, 슴베찌르개, 새기개 같은 작은 도구의 비중이 커졌다.

둘째, 전기 구석기시대 이래 일반 격지, 중기 구석기시대에 르발루아 격지, 후기 구석기시대에 돌날과 좀돌날 제작이 차례로 발달하였다.

셋째, 후기 구석기시대에 이르러 이전에 주로 사용되었던 석영암이나 규암보다 입자가 더 곱고 유리질 성분이 많아 예리한 날을 만들 수 있는 유문암, 규질셰일, 흑요석, 수정 같은 돌감이 선호되었다.

넷째, 굳은망치 직접떼기와 다듬기에서 무른망치 직접떼기, 간접떼기와 눌러떼기, 그리고 눌러다듬기 같은 새로운 기법이 점점 추가되었다.

이처럼 뗀석기의 역사는 소형화, 전문화, 표준화를 향해 나아갔으며, 여기에 새로운 양질의 돌감과 그것을 가공하기 적합한 기술 개발이 성공의 열쇠였다.

한국 후기 구석기시대 석기군의 특징

돌날, 좀돌날, 슴베찌르개, 밀개, 새기개 등으로 대표되는 후기 구석기시대 석기군에는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제작되었던 주먹도끼, 주먹자르개(cleaver), 공모양석기와 심지어 신석기시대에 성행한 간돌도끼와 U자형 뗀돌도끼 등도 소량 포함되어 있다.

즉, 전문화된 정교한 도구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전의 석기문화 요소도 잔존하고 심지어 나중 시대의 석기문화 요소까지 일부 내포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것은 후기 구석기인들이 이전의 문화를 배격하지 않은 채 혁신적인 도구 제작 기술을 추가해 생존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시대의 주인공들이 계승할 기술도 보유하였음을 의미한다.

한반도에서 42,000년 전에 등장한 슴베찌르개가 일본 규슈에서 29,000년 전 이후 수천 년 동안 유행하였다. 반면 일본열도 고유의 석기로 알려진 나이프형석기와 모뿔찌르개[각추상석기]가 단양 수양개 유적, 임실 하가 유적, 광주 삼리 유적 등지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장흥 신북리 유적과 순천 월평리 유적에서 규슈산 흑요석과 안산암으로 만든 석기가 발견된 반면, 일본 규슈 북부에 있는 다쿠(多久)와 오기(小城)의 안산암 원산지에서 박편첨두기[슴베찌르개의 일본식 용어]가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사례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구석기인들 사이에 교류가 잦았음을 알려준다.

잔석기

잔석기는 후기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기 전인 중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이것은 돌날을 작은 조각으로 부러뜨린 뒤 변의 일부를 잔손질해 다듬은 것으로 세모, 사다리, 반원 등의 기하무늬 형태를 띤다.

유럽의 중석기시대 유적에서 잔석기가 화살촉이나 찌르개의 미늘로 쓰인 사례가 보고되었고, 식물성 식량을 가공하는 데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기하 무늬 형태의 잔석기는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어 유럽식 중석기시대의 설정은 회의적이다.

간석기의 발달과 제작 기술

간석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처음 나타나는데 자귀날이나 조갯날의 돌도끼가 대표적이다. 이후 신석기시대는 정착생활에 따른 튼튼한 집과 살림살이용 가구의 수요가 증대해 벌목과 목재 가공에 쓸 다양한 간석기가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로 바다 자원을 식량으로 하는 해안이나 섬의 마을에서는 낚시, 그물추, 작살 같은 어로 도구인 반면, 농경에 의존도가 큰 강변 마을에서는 낫, 갈판 등의 농사 도구의 비중이 높았다. 그렇지만 활촉, 창끝 같은 사냥 도구와 간돌도끼, 간돌자귀 등의 목공 도구는 모두 공통된다.

사회의 계층화가 심화된 청동기시대에는 간돌검, 곤봉대가리 등으로 대표되는 전투용, 의례용 석기가 새롭게 등장하고, 신석기시대보다 더 소형화한 대패날과 끌, 그리고 턱자귀, 홈자귀 같은 정교하면서도 새로운 목공구가 발달하며, 반달돌칼과 세모돌칼 같은 추수 용구도 고안되었다.

간석기의 겉면에는 뗀석기에서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격지면 이외에 갈기[마연, polishing], 썰기[찰절, sawing], 쪼기[고타, pecking], 구멍 뚫기[천공, drilling]의 자국들이 남아 있다. 갈기는 숫돌로 돌을 갈아 날을 형성하거나 겉면을 매끈하게 만드는 수법이다.

썰기는 돌감을 일정한 크기로 조각내기 위해 돌톱으로 얇고 판판한 석재에 일정한 간격의 홈을 만드는 수법인데, 마치 초콜릿을 조각으로 부러뜨리기 쉽게 홈을 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쪼기는 새가 부리로 모이를 쪼듯 정으로 돌을 쪼는 기법으로 떼기보다 더 정교하게 면을 다듬는데 쓰였다.

구멍은 뚜르개와 활비비를 활용하여 뚫었는데, 반달돌칼처럼 끈을 꿰어 쥐기 편하게 하거나 구슬을 꿸 때 필요하였다.

각 수법들은 ① 떼기와 갈기[예: 간돌도끼], ② 떼기와 쪼기[예: 갈판], ③ 떼기, 쪼기와 갈기[예: 홈자귀], ④ 떼기, 썰기와 갈기[간돌활촉], ⑤ 떼기, 갈기, 구멍뚫기[예: 반달돌칼] 등의 조합으로 여러 가지의 간석기를 완성하는 데 쓰였다. 이처럼 간석기는 뗀석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거기에 갈기, 썰기, 쪼기, 뚫기 기술이 더해져 완성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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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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