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善修, 1543~1615)의 성은 김씨이고 호는 부휴(浮休)이다. 전라남도 남원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적산(積山), 어머니는 이씨이다.
선수는 1543년에 태어나 20세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명(信明)에게 출가했다. 부용 영관(1485∼1571)에게 배운 후 그의 법을 이었다. 이후 덕유산, 가야산, 속리산, 금강산 등 명산의 이름 있는 사찰에서 수행에 정진했다. 유학자이자 고위 관료였던 노수신(盧守愼)의 장서를 7년 동안 빌려 읽고 유학과 시문을 배웠다. 서예에도 뛰어나 왕희지체를 잘 썼고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과 함께 당대의 '이난(二難)'으로 불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수는 덕유산에 있던 초암에 머물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일본군 수십 명을 만났는데, 이들이 선수의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자세를 취했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있었다. 그러자 일본군들은 놀라며 그에게 절을 하고 물러갔다. 선수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있을 때에는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城)이 찾아와서 며칠 동안 법문을 듣고 칭송했다고 한다.
1609년 선수는 조계산 송광사(松廣寺) 측의 요청으로 문도 400명을 이끌고 송광사에 가서 조전(祖殿) 개수를 시작으로 중창 불사를 주도하였다. 1612년에는 두류산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떤 승려의 무고로 제자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판명나 풀려났다. 당시 광해군은 선수와 각성을 불러 법을 청해 듣고 기뻐하였다. 왕은 금란가사와 푸른 비단 장삼 한 벌, 금강석 염주 등을 선수와 각성에게 내려주었고 두 사람을 각각 대불(大佛)과 소불(小佛)로 높이 칭하였다. 이후 광해군의 원찰인 양주 봉인사(奉印寺)에서 재(齋)를 설할 때도 부휴 선수를 증명법사로 삼았다.
1614년 선수는 조계산에서 지리산 칠불사(七佛寺)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음해 7월 벽암 각성에게 법을 전해주었다. 1615년 11월 1일 목욕재계를 한 뒤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 법랍 57세였다. 제자들이 화장을 하고 영골(靈骨)을 얻어 송광사 · 칠불암 · 해인사 · 백장사(白丈寺)에 탑을 세웠다. 비는 뒤에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송광사에 건립되었는데, 이들 사찰은 그가 주석했거나 중창에 관여한 곳이다.
부휴 선수는 평생 수행에 힘썼고 격외선(格外禪)과 함께 정토를 중시했다. 저서로는 『부휴당(대사)집』이 있다. 부용 영관의 법을 이었고, 문하에는 700여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벽암 · 뇌정(雷靜) · 대가(待價) · 송계(松溪) · 환적(幻寂) · 포허(抱虛) · 고한(孤閑)으로 이어지는 7파가 유명하다. 그의 법맥을 이은 부휴계는 청허 휴정(1520~1604)의 청허계와 함께 조선 후기 불교계의 양대 계파를 이루었다. 부휴계는 송광사와 화엄사(華嚴寺) 등을 주요 근거지로 삼았고, 벽암 각성 때에 독자적 계파로 토대를 다졌다. 각성 손제자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 대에 이르러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유풍을 내세우며 계파적 정체성을 명확히 하였다.
광해군은 선수에게 '부종수교변지무애 홍각대사등계존자(扶宗樹敎辯智無礙弘覺大師登階尊者)'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