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덕구(德久), 호는 칠봉(七峯).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성담년(成聃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성몽정(成夢井)이고, 아버지는 장흥고령(長興庫令) 성예원(成禮元)이다. 어머니는 진사 이수량(李守諒)의 딸이다.
1552년(명종 7)에 생원이 되고 경릉참봉(敬陵參奉)·돈녕부봉사를 역임하였다. 1559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에 부임되었다가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으로 옮겼다. 그 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대교(待敎)·검열·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형조정랑·감찰·강원도도사·형조정랑 겸 춘추관기사관·호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66년에는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평안도도사·호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68년에 개성경력(開城經歷)이 되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옛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서경덕(徐敬德)과 함께 제향하였다.
1570년 성균관의 직강(直講)·사예(司藝)가 되었으며 그 뒤 부평부사·사옹원정(司饔院正)·군자감정(軍資監正)·상의원정(尙衣院正)·회양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6년에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예부(禮部)를 통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했고, 1590년에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책봉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였는데, 이듬해 임금이 영유(永柔)에 머물 때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部副摠管)에 제수되었다. 왜적이 물러가자 왕비를 해주에 호종하기도 하였다.
1595년 개성유수가 되어 백성을 안접시키고 향교를 중건하여 학풍을 진작시켰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부총관으로 왕비를 수안으로 호종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이듬해 해주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