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계진(季進), 호는 문탄(聞灘). 손순무(孫荀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손세경(孫世經)이고, 아버지는 손덕운(孫德雲)이다. 김우옹(金宇顒)과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00년(선조 33) 향시에 합격한 뒤 1606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론(文廟從祀論)이 일어나 정인홍(鄭仁弘)이 이를 논척하자, 종질인 손처눌(孫處訥)과 함께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만들어 이를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정인홍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히었다. 1615년 안동교수(安東敎授)가 되고, 1618년 예문관봉교를 거쳐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병조좌랑, 단성현감을 지냈는데 자못 치적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정경세(鄭經世)에 의하여 추천되어 의병장이 되었고, 난후 향리로 돌아가 벼슬하지 않았다. 정경세가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어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하였지만 끝내 따르지 않고 장현광(張顯光)·김상용(金尙容)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문집에 실려 있는 시는 강직한 성품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걸작으로 칭송받았다. 대구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탄집(聞灘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