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적만(敵萬), 호는 야촌(野村). 손흥효(孫興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손당(孫榶)이고, 아버지는 손신의(孫愼儀)이며, 어머니는 이심근(李深根)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 해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치고 성균관에 등용되어 오수찰방(獒樹察訪)·전적을 거쳐 공조·예조·형조의 좌랑을 지냈다. 1674년 현종이 죽었을 때 도감랑(都監郎)으로서 모든 일을 순서있게 처리하자 당상관들이 그 재주를 칭찬하고 일마다 손만웅과 의논하여 행하였다.
1675년(숙종 1) 병조좌랑에서 영광군수로 내려가 선정을 베풀었다. 정언·호조정랑·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지평으로 있을 때 김수흥(金壽興)을 서용하려고 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제(服制) 문제에서 그가 효종을 ‘체이부정(體而不正: 장자나 장손 이외의 왕자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 그 위치는 장자나 장손의 지위(=體)이나 자연인으로는 장자가 아닌(=不正) 것을 일컬음)’이라고 하여 파직당하였던 죄목을 내세워 조리정연하게 논핵(論劾)하여 취소시켰다.
1677년 사예로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사도시정(司䆃寺正)·사헌부장령·공주목사·나주목사·괴산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나, 가정이 빈한하여 서책과 장복(章服)을 팔아서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청주목사에 제수되었다가 파직되었는데 대신들이 상주하여 유임되었다. 그 뒤 동래부사를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