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화는 1780년에 조성되었으며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知訥)과 15인의 고승(高僧) 진영(眞影)이다. 쾌윤(快玧)이 수화사가 되어 제작하였으며 1995년 송광사 국사전의 도난 사건으로 13점이 도난당하여 현재는 3점만이 남아 있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에 소장되어 있다.
199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세로 134.8㎝, 가로 77.4㎝의 크기에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다. 모두 16축(軸)이었으나 13점이 도난당하여 현재는 3점만이 남아 있다.
송광사에서는 고려후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을 비롯하여 나라를 이끄는 16국사(十六國師)를 배출하여 우리나라의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승보사찰(僧寶寺刹)이 되었다. 특히 송광사국사전(國師殿)에는 제1세 보조국사 지눌의 진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국사의 진영을 순차적으로 봉안하였다. 16국사는 1세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2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3세 청진국사(淸眞國師) 몽여(夢如, ?∼1252)·4세 진명국사(眞明國師) 혼원(混元, 1191∼1271)·5세 원오국사(圓悟國師) 천영(天英,1215∼1286)·6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1226∼1292)·7세 자정국사(慈靜國師)·8세 자각국사(慈覺國師)· 9세 담당국사(湛堂國師)· 10세 혜감국사(慧鑑國師) 만항(萬恒, 1249∼1319)· 11세 자원국사(慈圓國師)·12세 혜각국사(慧覺國師)·13세 각진국사(眞覺國師, 1270∼1355)·14세 정혜국사(淨慧國師)·15세 홍진국사(弘眞國師)·16세 고봉화상(高峰和尙) 등 송광사를 중심으로 고려후기에 활약했던 16분의 고승이다.
이 16조사 진영은 1780년 4월에 응성(應星) 지호(旨顥)가 증명법사가 되어 금어(金魚)인 쾌윤(快玧)과 복찬(福粲)에 의해 중성(重成)하였다. 화기(畵記)는 보조국사 진영의 아랫부분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밖의 진영에는 해당 시주자의 이름만이 적혀 있다. 하지만 16점 모두 규격이나 제작 기법이 동일하여 같은 시기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진영의 형식은 모두 전신7분면의 의자상으로 이 가운데 의자위에서 가부좌한 모습을 표현한 것은 9점에 해당한다. 짝수 세의 국사 진영이 오른쪽 얼굴을 보이며 중앙을 향하고 있으며 홀수 세의 국사 진영은 왼쪽 얼굴을 보이며 중앙을 향하게 그렸다. 지물로는 주장자(柱杖子)나 불자(拂子)를 들었으며 지물이 없는 경우 선정인(禪定印) 또는 설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1995년 국사전 후면에 흙벽을 뚫고 침입한 도난으로 16점의 진영은 1세, 2세, 14세의 3점을 남기고 모두 도난당하여 현재는 3점이 소장되어 있다.
녹색과 적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채색하였으며 철선(鐵線)으로 윤곽을 그리고 주름진 곳은 농담을 달리하는 색감의 효율성을 살려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장삼에 비하여 가사는 매우 자유스런 문양과 다채로운 색상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옷자락의 표현은 철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색의 농담으로 각 부분을 묘사하였다. 화면구성면에서는 바닥면과 벽면을 구분하지 않는 전통적인 화면구성을 따르고 있다.
현존하는 작품은 1780년의 조성기를 가지고 있다. 1678년에 세워진 「송광사사적비」에 의하면 절의 동쪽에 16선사의 영당(影堂)이 있다고 하였으며, 1621년에 쓰여진 「16국사진영기(十六國師眞影記)」에도 이곳의 진영들이 1560년(嘉靖 39, 명종 15)에 조성된 것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전기 이래로 계속 옮겨 그려지며 이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 불교를 빛낸 그들의 덕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조성된 진영과 국사전은 우리나라 승보사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