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경상북도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풍산 유씨(豊山柳氏) 우천파(愚川派) 종택이다. 강고(江皐)유심춘(柳尋春)이 집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1762년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추정된다. 강고의 아들 낙파(洛波)유후조(柳厚祚)도 이 집 태생이다.
철종 9년(1858) 61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67세에 공조판서, 70세에 좌의정이 되는 늦은 환로(宦路)에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까지 이른다. 그가 79세에 죽자 문헌공(文憲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로 인해서 이 집은 더 유명해졌다.
낙동강과 지류인 위천(渭川)이 합쳐 이수(二水)가 되고, 속리산 · 팔공산 · 명산이 만나 삼산(三山)이 되는 형국으로 명기(名基) 중의 한 곳이라 손꼽히는 고장이다. 집터는 남남동향, 네모 반듯한 대지에 앞에서부터 녹사청(祿使廳) · 안채 · 사당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 중문 밖 동편으로 ㄴ자형 평면의 녹사청이 있다. 안채쪽으로부터 대청 2칸, 다음이 방, 부엌 그리고 꺾이면서 사랑채를 마주보는 위치에 방 3칸이 나란하다. 툇간은 없고 방 앞에 쪽마루를 설치한 격이 낮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사랑채를 향해 동북향한 특수한 성격을 지녔다. 중문에서 돌아앉은 일종의 내외벽 같은 구실이 겸비되어 있다. 안채는 ㅁ자형 평면이며 중문간은 앞쪽 서쪽 끝에 있다. 문을 들어서면서 벽이 앞을 가로막아 다음 칸으로 해서 내정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는데 중문칸 동편에 사랑방이 계속되어 있다.
사랑은 2칸 방에 마루 1칸, 여기에서 꺾이면서 동쪽 날개가 구성되는데 북쪽으로 방 2칸이 연속되고 다음이 마루, 그리고 이어서 안채 본당에 이어진다. 남향한 본당은 6간 대청이 열렸는데 동남쪽 1칸에 방을 들였다. 대청에 이어 안방 2칸, 앞에 툇마루가 있다. 이어 부엌인데 3칸이나 되는 넓은 공간을 차지했고 이어 찬방이고 다음이 곳간으로 중문칸과 연이어진다.
여기 곳간은 고방이라 부르는데 찬방 아래에 땅광을 지하실처럼 만들고 부엌에서 층계로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안방에서 사랑방에 이르기까지 대청과 쪽마루로 연계시켜서 신발을 신지 않고 왕래할 수 있게 하는 편의를 도모한 것이 이 집의 특색이다.
홑처마, 오량집인데 대청은 연등 천장을 하였다. 사당은 동북 귀퉁이에 따로 일곽을 이루었다. 정면 3칸, 측면 간 반 통(間半通) 맞배지붕인데 앞의 반 칸을 벽체 없이 개방하였다. 살기둥의 주초석은 모를 죽인 팔각형이며 위 부분이 좁아진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 최상급의 벼슬살이한 교양 있는 집의 가묘답게 조성하였다. 사당 앞 신문(神門)은 사주문(四柱門)이다. 사당은 단청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