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은 조선전기 함경도남병사, 삼도순변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546년(명종 1)에 태어나 1592년(선조 25)에 사망했다. 글읽기보다 무예 닦기를 좋아하여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임진왜란 전에는 북방의 야인들을 소탕하여 육진을 지키고 용맹을 떨쳤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충주로 내려갔다. 조령을 요충지로 삼아 잠복 전투를 하자는 건의를 무시하고 기병 활용을 통한 정면돌파를 주장하여,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자 남한강에 투신, 순절했다.
어릴 때부터 글읽기보다 무예 닦기를 좋아하여 22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 도총관 · 도사(都事) · 경력(經歷) 등의 벼슬을 거쳐, 외직인 진주판관으로 나갔다. 이 때 문장가로 이름난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으로부터 거친 성격을 고칠 것을 종용받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목사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기도 하였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이탕개(尼湯介)가 거느린 야인(野人)들이 침입하여 훈융진(訓戎鎭)을 공격, 첨사 신상절(申尙節)이 위급하게 되자 유원첨사(柔遠僉使) 이박(李璞) 등과 합세하여 적병 50여 명을 목베고 이어 적군을 추격, 두만강을 건너가서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또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에 침입한 야인들 및 같은 해 5월 종성에 쳐들어온 이탕개의 1만여 군대를 물리쳤다. 평상시에 철기(鐵騎) 500여 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켜 그 민첩함이 귀신같아 야인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이 때 육진(六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신립의 용맹 때문이었다. 북방의 전승이 보고되자 조정에서는 1584년 3월에 함경도북병사로 임명하고, 남철릭(藍一: 무관의 公服의 하나) · 환도(環刀: 군복에 착용한는 군사용 칼) · 수은갑(水銀甲) · 두구(頭口) 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신립의 노모에게는 매일 고기와 술을 보내고 병이 나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1587년 2월 왜선 18척이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임명되어 군관 30명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이 철수한 뒤라 돌아오던 중, 양가의 딸을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나 곧 함경도남병사로 다시 임명되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야인 부락에 출정, 적병 20명을 목베고, 말 세 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 해 10월 보장(堡將)을 맞대놓고 욕한 갈파지보(乫波知堡)의 수졸(戍卒)을 목베어 죽였다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한직으로 전보되었다. 1590년 2월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내직인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항상 군비(軍備)의 부족함을 논하여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삼도 도순변사로 임명하고 보검을 하사하였다. 이에 특청(特請: 특별히 요구사항을 청함)하여 유성룡(柳成龍)의 막하에 들어가 부장 김여물(金汝岉) 및 80명의 군관과 시정백도(市井白徒: 일반 시민으로 군사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 수백 명을 모병하여 충주로 떠났다. 이어 부장 몇 사람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으로 내려가 지형을 살폈다.
이 때 군관 60여 명과 군졸 4,000여 명을 이끌고 남하했던 순변사 이일(李鎰)이 경상도 상주에서 왜군에게 패하여 쫓겨와 신립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여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이일의 재주를 아껴 용서하고 오히려 선봉장으로 삼았다. 이일은 왜군의 정세가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대군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김여물 등이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들어 지형이 험한 조령에서 잠복, 전투를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병의 활용을 극구 주장하여 군대를 돌려 충주성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彈琴臺)에 나아가 배수진을 치고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해 4월 28일 배수의 진을 친 아군을 향하여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두로 한 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오자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아군의 힘을 믿고 미처 피난을 하지 않았던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들이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아군이 섬멸되자 김여물 · 박안민(朴安民) 등과 함께 남한강물에 투신, 순절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