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회원(會元). 직장(直長) 양사위(梁思渭)의 후손이며, 양이하(梁以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 양팽손(梁彭孫)이며, 아버지는 대사성 양응정(梁應鼎)이다.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했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經書)에만 전심하였다. 천문·지리·병학에도 뛰어났다. 동서 분당시 서인으로 조헌(趙憲)과 함께 이이(李珥)·성혼을 지지하며, 동인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을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양산룡(梁山龍)과 함께 나주에서 창의(倡義)해, 김천일(金千鎰)을 맹주(盟主)로 삼아 부장이 되고 형은 운량장(運糧將)이 되었다. 향리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며,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뒤 김천일과 함께 북상하고, 수원에 출진해 활약하였다. 강화도로 진을 옮길 무렵, 곽현(郭賢)과 함께 주장의 밀서를 가지고 해로의 간도(間道: 샛길)를 따라 의주 행궁(行宮: 임시 궁궐)에 도착해, 선조에게 호남·영남의 정세와 창의 활동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공으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다.
돌아올 때 영남·호남에 보내는 교서를 받아서 남도에 하달하였다. 적이 남도로 퇴각하자 김천일과 함께 남하해 진주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침공하려는 왜의 대군 앞에 군사 부족으로, 홍함(洪菡)과 함께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의 군진에 가서 원군을 강청했지만 실패하였다.
성에 다다르자 홍함마저 도피해 단신 입성하여, 적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해 자결했다고 한다.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