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문 ()

오희문 쇄미록 1책 임진남행일록
오희문 쇄미록 1책 임진남행일록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 중의 피란일기인 『쇄미록』을 저술한 학자.
이칭
비연(斐然)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39년(중종 34)
사망 연도
1613년(광해군 5)
정의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 중의 피란일기인 『쇄미록』을 저술한 학자.
개설

호는 비연(斐然). 할아버지는 석성현감(石城縣監) 오옥정(吳玉貞)이고, 아버지는 장성현감 오경민(吳景閔)이며, 어머니는 남인(南寅)의 딸이다. 부인은 연안 이씨로, 이석형(李石亨)의 증손녀이다. 외가인 영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으나, 집은 서울 관동(館洞: 지금의 종로구 명륜동)에 있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1년(선조 24) 11월 처남인 장수현감 이빈(李贇)과 영암에 사는 매부 임극신(林克愼)과 함께 영동의 외가를 방문하고, 장흥·성주 등에 있는 노비의 신공도 받을 겸 두 명의 종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다가 왜란을 당해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피난하였다.

그때 피란일기인 『쇄미록(瑣尾錄)』을 남겼다. 여기에는 노비 신공을 거두는 일과 임진왜란 중의 정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장수에서 들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86일간 장수현감의 가족과 함께 산중으로 피난해 영취산 서남사고지(西南寺故址) 및 석천암(釋川庵)에서 피난살이의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장수현감으로부터 전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으며 이것을 일기에 상세히 남겼다. 그 뒤 예산 사곡에 살고 있던 부호 이광축(李光軸)의 서당을 빌려 살았다. 부여현감 박동도(朴東燾), 정산현감 김장생(金長生), 홍주목사 이총(李摠), 금정찰방 김가기(金可幾) 등과 교유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예산으로 피난했던 가족을 만났으나 1593년 1월에 전염병이 돌아, 이를 피하는 방책으로 멀리 사는 처가 등으로 다시 가족이 흩어져 거주했으며, 자신은 친지 조존성(趙存性)이 있는 임천 수다동에 우거해 3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아들 오윤겸(吳允謙)의 친구이자 함열현감인 신응구(申應榘)에게 장녀를 후취로 혼인시켰고, 이후 사위의 도움으로 다소 곤궁을 덜었으며, 일가의 생활비를 함열 관아에서 담당하였다.

1596년 신응구가 퇴직해 남포 농막으로 들어가고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결렬되어 왜가 재침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안도 평강 수령으로 가 있는 아들 오윤렴에게로 거처를 옮겨 4년 간 우거 생활을 하였다. 1601년 10년 간의 유랑생활을 끝내고 서울에 돌아와 살았다.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나 아들 오윤겸이 높은 벼슬에 오름으로 인해 선공감 감역이 되었고, 사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에 있다.

참고문헌

『해주오씨대동보』1(해주오씨종친회, 1991)
「쇄미록해제」(서병패, 『서지학보』8, 1992)
「쇄미록해제」(신석호, 『한국사료해설집』, 한국사학회, 1964)
「鎖尾錄を求めて」(貫井正之, 『三千里』49, 1987)
집필자
정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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