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 51,896㎡. 1894년 10월 23일부터 25일,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격전이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곳.
1894년 10월 16일경 전봉준과 손병희가 각각 이끌던 남접과 북접의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합류하였다. 같은 달 21일 2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서울 진격로에 있는 충청감영 소재지 공주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세 길로 나누어 공주를 압박한 동학농민군은 이인역, 봉황산, 효포 등지를 차례로 점령하였으나, 25일에 감행한 웅치 공격은 관군과 일본군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관군측의 병력도 증강되어 경리청 소속 부대 외에 일본군 1개 대대까지 가세하여 2천여 명에 달하였다.
경천점으로 후퇴하였던 동학농민군은 11월 8일 2대로 나누어 공격을 개시하여 판치와 이인을 점령하였다. 전력을 재정비한 양측은 다음날 효포로부터 웅치와 우금치에 이르는 30리 전선에서 대격돌하였다.
우금치는 전봉준 휘하의 동학농민군 주력 1만여 명이 40∼50차례에 걸쳐 돌격전을 감행한 고개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을 가진 관군과 일본군의 저항과 반격으로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이후 전라도 쪽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우금치 혈전은 동학농민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대회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곳에는 1973년에 건립된 동학혁명 위령탑(東學革命 慰靈塔)이 서 있다.